2012년, 데뷔 이래 최고로 바쁜 나날을 보낸 밴드 페퍼톤스(Peppertones·신재평 이장원)가 기습적으로 새 음반을 들고 돌아왔다.
늦가을 밤바람이 코 끝을 알싸하게 스치는 11월, 한 해의 마무리를 앞두고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아쉬울 이들을 위한 또 하나의 ‘뉴테라피’가 담긴 페퍼톤스의 작은 선물. 앨범 타이틀이 무려 ‘Open run’이다.
1집부터 4집까지, 대략 2년에 한 장씩 음반을 내놓던 페퍼톤스답지 않은(?) 성실함이 반갑기까지 하다.
“오픈 런, 상징적인 단어죠. 고삐를 늦추지 말자는 거니까. 끝을 정해두지 말고 힘 닿는 데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는 취지의 제목입니다.”
지난 봄, 4집 발매 내놓은 뒤 쉴 틈 없이 달렸기 때문일까. 오히려 할 말이 더 많아졌단다.
“4집 나온 뒤 할 일(공연)이 많아져 진득하게 앉아 곡을 쓸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이번엔 왠지 곡을 쓸 만한 좋은 기분이 많이 들었어요. 공연 하러 지방에 내려가는 차 안이라던가 다 끝나고 녹초가 돼 올라오는 차 안에서 쓸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쓰게 됐죠. 사실 무대에서 관객들을 많이 만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잘 몰랐어요. 올해 소극장 장기공연과 지방 클럽투어 이런저런 페스티벌 등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예전만큼 긴장도 안 하게 됐고, 편한 마음으로 하니 더 즐길 수 있게 됐어요. 또 저희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들을 귀기울여주고 웃으며 따라 불러주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니까 자신감이 생긴 것 같고요. 쓰면 잘 들어주겠지 하는 믿음이 생겨서, 수월하게 쓰게 됐어요.”
공연 뒷풀이 도중 등장한 뜬구름 같은 계획에서 출발한 이번 EP 작업은 가을 페스티벌 시즌 본격화 돼 불과 3주 만에 녹음, 편집, 믹싱까지 끝냈다. 탄력을 아주 제대로 받았다. 드럼(신승규), 일렉기타(재인), 건반(양태경) 등 일 년 내내 합을 맞춘 밴드 연주자들과의 호흡 또한 최상이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현란한 연주에선 밴드 특유의 강한 자신감도 엿보인다.
자칭 ‘은하계 수준의 가벼운(?)’ EP 앨범에는 타이틀곡 ‘노래는 불빛처럼 달린다’를 비롯해 ‘계절의 끝에서’, ‘Furniture’(퍼니쳐), ‘신도시’, ‘검은 우주’ 등 총 다섯 곡이 수록됐다. 페퍼톤스 특유의 밝음은 유지하고 있지만 밴드 편성으로 달라진 4집의 연장선인 만큼, 따뜻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오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행운을 빌어요’의 경우 단편 영화 한 편을 본 것 처럼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는데, ‘노래는 불빛처럼 달린다’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곡의 길이라던가 표현 기법 등은 대중음악의 틀 안에 있지만, 노래 한 곡으로 무언가 스토리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죠. 그야말로 드라마가 있는 곡이에요. 음악적으로는 한 번 들으면 페퍼톤스 음악이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구성했고요.”
‘계절의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달려온 페퍼톤스의 올 한 해 여정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더욱 특별할 곡. ‘퍼니쳐’는 신재평이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쓴 곡으로 어떤 기교나 꾸밈도 없이 담백하게 완성했다. 보컬 및 기타 녹음은 신재평의 집에서 진행돼 곡의 느낌을 더한다.
기묘한 이미지의 하드 록 ‘신도시’와 사이키델릭 풍의 ‘검은 우주’는 과거 작업하던 곡을 다시 손질해 수록했는데, 기존에 볼 수 없던 상남자(!) 포스까지 풍긴다. ‘검은 우주’의 경우, 시공을 초월한 페퍼톤스 특유의 감각이 돋보인다.
“우주에서 미아가 된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에 빗대 극한의, 혹독한 외로움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별이나 행성,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자기의 궤도를 조종할 수도 없고 떠다니다가 나는 끝나겠구나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딱히 이유가 있어서 쓴 건 아니고, 가끔씩 밤에 한밤중에 그런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런 감정을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하긴 싫으니까 이러한 상황에 빗대어 쓰게 됐죠.”
문득 35년간 우주를 항해해 온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 영역, 이른바 ‘검은 우주’에 진입했다는 최근의 보도가 오버랩 된다.
지구, 별, 행성, 우주 등의 단어로 매 앨범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우주’는 페퍼톤스에게 어떤 의미일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우주소년단이었다”고 커밍아웃(!) 한 이장원에 이어, 신재평 또한 페퍼톤스의 ‘우주 사랑’에 대해 설명했다.
“음. 일단 우리가 살면서 늘 밤마다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면 보이는 것들이지만 큰 의미 부여를 안 하고 지나치는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좀 생각을 하다보면, 엄청난 공간감과 시간을 느낄 수가 있죠 본다는 것 자체에서. 현실 속의 비현실 같은 느낌이랄까. 마법 같은 이야기가 저 하늘만 봐도 있는데, 평소에는 잘 의미 부여를 안 하고 사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 싶어 종종 쓰게 됩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역시 예전만큼 두렵거나 긴장되는 일은 아니에요.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안분지족을 하는 것 같아요(웃음). 잘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듣기 불편하진 않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개성 있는 보컬이었으면 좋겠어요. 들으면 누구 목소리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신재평)
그렇다면 그간 페퍼톤스 지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여성 객원보컬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걸까.
“글쎄요. 무엇보다 이런저런 다양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을 벌여놓았다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고, 밴드 포맷은 아리따운 여성 분들과 노래하는 걸 포기한 부분이기도 한데, 그런 부분이 아쉬운 것도 있지만 다음 음반에 대해서도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아차. 매 순간 변화무쌍한 페퍼톤스에게 미래에 대한 어떤 확답을 요구한 것은 어쩌면 우문(愚問)이었으리라. 그래도 이례적으로 한 해에 두 장의 앨범을 손에 쥔 이들에게, 진짜 ‘Open run’이 가능할 지, 내친김에 EP 이후 행보까지 내다보자 선수를 쳐봤다.
“마음은 정말 그러고 싶어요. 올해처럼 정말 열심히 에너제틱하게 그렇게 내년에도 하고 싶고, 평생 작품 많이 발표하는 성실한 음악가이고 싶은데, 올해처럼 잘 풀릴지는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예전에도 다작을 하고 싶다고 얘기 하고 싶었었는데 은근히 그게, 결심한다고 해서 실현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꽤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약속을 못 지켰었죠. 심지어 3집 땐 발표 날짜를 정해놓고 미안하다고, 앨범 안 나왔다고 사과한 적도 있고요. 만약 또 뭔가 막히게 되면, 텀이 길어질 수도 있고 안테나 레이블의 다른 팀들 음반도 준비 중이니까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고집스럽게 내야 기다린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장인정신을 갖고 내는 게 좋을 때도 있고. 우리 음반을 기다려주는 지지자들이라면 기다려주실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온 건 아니지만 음… 누군가 얘기를 꺼낸 적은 있어요. 변신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배신이 되면 안 되는 것이고. 4집 같은 경우 가슴 졸이고 낸 음반이었는데 그게 받아들여져서 기뻤고, 한동안 같은 포맷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안주하면 안 되니까 다음 음반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드려야겠죠. 그 와중에 솔로 음반 같은 것을 각각 한 장씩 발표한다면? 진짜 그야말로 큰 변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솔로 음반) 얘기가 나온 적은 있는데, 글쎄요. 지금 당장은 그러한 요구가 크진 않은 것 같아요. 만약 낸다면 아마 대판 싸우고 내지 않을까요?(웃음)”
‘대판 싸움’이라는 솔직한 표현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이. 10년도 넘게 단짝으로 지내온 신재평, 이장원의 페퍼톤스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둘도 없는 친구지만, 음악이라는 ‘일’로써 뭉칠 때면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친구로서는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가면 되는데, 일할 때는 100% 의기투합 해서 작품 하나를 만들어야 하니까 조율을 많이 해야 되는데요. 그럴 때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죠. 인격적인 부분이 아니라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데 있어서 벌어지는 논쟁들이 많이 있는 편이에요. 지금은 특별히 싸울 일이 없는데, 20대 때는 더 많이 싸우긴 했죠. 음, 싸운다기보다는 제가 장원이한테 학교 그만두고 음악 하자고 해서.(웃음)”(신재평)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들으며 재미 삼아 시작된 프로젝트 밴드, 페퍼톤스. 홍대 짬밥(!) 먹던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운이 좋았다”며 지난 행보를 겸손해하는 이들이지만, 어느새 페퍼톤스에겐 ‘밴드의 신’이라는 수식어가 습관처럼 따라온다.
“사-실 그 표현은 ‘안녕하세요 페퍼톤스 ‘밴드의 신’재평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입니…”(이장원, 일동 폭소)
“무슨 소리야~~ 어휴. 저희가 밴드의 신이라니요. 공연 정말 많이 하는 분들을 많이 봐왔는데,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밴드의 신이라는 말을 듣기엔 겸연쩍죠. 사실 ‘행운을 빌어요’ 뮤직비디오에서 ‘The God of Band’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서 시작된 말이거든요.”(신재평)
마치 ‘지식왕’이 빙의된 듯한 말투의 이장원이 차근차근 논리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재평은 “사실 어떤 표현도 다 감사하다.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불러달라”고 체념한 듯(?)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참 좋았다”는 말을 거듭한 페퍼톤스는 2012년을 이렇게 자평했다. “우리는 지금,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보다 더 잘 돼야지 하고 조바심이 나는 건 아니고, 그냥 올 한 해는 정말 좋아요. 우리가 TV 스타도 아니고,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하는 슈퍼밴드도 아니지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큰 욕심을 안 부리면, 야심 없는 팀이 되면 재미없겠지만 욕망이란 건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하니까. 지금은 한 해를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 때 만났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생각입니다.”
즐거운 기억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불타는 12월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 페퍼톤스는 연말 콘서트에 대해 “올해 했던 어떤 공연보다도 더 좋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며 “지금은 아련한 기분을 느낄 여유는 없고, 연말 공연이 끝나고 나면 펑펑 울지도 모르겠다” 했다.
연말 콘서트를 마치고 나면 한 살 더 먹게 되는 이들에게 인터뷰 말미, ‘삼땡’(33세)이 되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신재평이 먼저 “해외여행”이라고 답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레이블 차원에서 큰 공연 끝나고 해외여행을 갔거든요. 올 한 해 동안 지방 공연도 많고 했는데 한번쯤은 고생했던 사람들과 우르르 가서 쉬다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신재평)
“어, 난 (미국에 있는) 동생 만나러 가고 싶다고 얘기하려 했는데.(난감해하며) 음… 그럼 저는, LA 가서 공연하고 동생 만나고 싶어요.”(이장원)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안테나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