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규 5집 앨범을 발매하고 크고 작은 공연은 물론, 방송 활동까지 열심히 달렸던 지난 2011년. 그는 전매특허인 ‘스위스 개그’ 하면 루시드폴을 곧바로 떠올릴 정도로 대중적 저변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천재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프로필(로잔연방공과대학대학원 생명공학 박사, 2007년 스위스 화학회 고분자과학부문 최우수논문발표상)과 결코 흐트러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미지의 루시드폴은 그 해 연말 콘서트를 깔끔하게 마친 뒤, 음악 활동에 잠시 쉼표(,)를 찍었다.
많은 일에 에너지를 쏟다 보니 “음악적으로 많이 소진되는” 건 제아무리 슈퍼맨이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년 초, 4월 콜라보레이션 공연 준비를 하면서 처음으로 스트레스성 불면과 치주질환이 오더라고요. 잇몸이 부어 씹기도 어렵고 잠도 못 잤죠.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는데, 아마도 제 생각엔 뭔가가 소진됐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소진된 상태에서 새로운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적 고갈이 합쳐진 거죠.”
스스로에게 ‘안식기’에 준하는 시간을 선물했음에도 불구, 마냥 쉴 줄 알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펜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판 위에 손을 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 공식홈페이지 겸 개인 블로그인 ‘물고기마음’에 일기를 써내려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갖가지 상상력이 동원된 이야기였다.
뚜벅뚜벅 써내려간 글은 지난 1월, 단편 소설집 ‘무국적요리’로 완성됐다. 다만 야심차게 출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된 일”이었다.
![]() |
브라질 음악가이자 작가인 시쿠 부아르키의 장편소설 ‘부다페스트’ 번역 작업을 하던 중 맺은 인연으로 탄생한 ‘무국적 요리’. ‘탕’ ‘똥’ ‘행성이다’ ‘싫어!’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의 제목은 초고를 담아뒀던 폴더 이름이기도 하다.
“‘무국적요리’는 교토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간 식당의 이름인데, 자꾸 머리에 맴돌더군요. 솔직하고 자유로워 보였죠. 무언가 대책 없이 섞였다기보다는 아무런 정체성이 없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각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별이나 지명, 국적, 시대, 역사적 배경은 최대한 탈색됐다. “여기가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현실 같기도 하고 비현실 같기도 한 공간,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현재의 이야기 같기도 하게 느껴지게 썼어요. 이성적으로, 깊게 생각하고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직관적으로 내가 쓰려던 소설과 맞는다는 생각으로 쓴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는 듯 보이지만 그 밑에는 보이지 않는 고리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책 속에는 기성 작가들과 차별화된 루시드폴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화법에, 허를 찌르는 강력한 반전이 숨어있다. 오랜 시간 서정적인 음악으로 대표돼 온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당한 파격이다.
“노래와 다르다는 얘기는 많이들 하세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노래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좁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더 답답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요. 가령 미선이(밴드) 때나 솔로로 활동할 때도 다르고, 그에 따라 그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도 달라지는데, 어떻게 보면 음악적으로 제가 독특한 위치가 있겠지만, 또 그런 만큼 굉장히 좁거든요. 제 능력도 그렇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는 가사나 이야기가 굉장히 한정적이었을 거예요.
![]() |
평소 섬세하기로 소문난 그는 단어 하나 선택할 때도 신중을 거듭한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니, 과연 ‘음유시인’이라 칭할 만 하다. 그는 긴 호흡의 글을 통해 가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머리 속을 부유하는 무한 상상력을 표현할 수 있는 탁 트인 장(場)을 만난 듯 했다.
“말도 못하죠(웃음). 예전에 3집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에 대해 한 지인이 ‘우리나라 가요에서 죄인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쓰는 노래는 이 노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얘길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가사적인 터부(taboo)를 깨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되니 그것도 한계가 있더군요. (가사가) 노래에 묻어나야 되고, 곡의 무드를 깨면 안 되고. 5집 즈음 돼서 가장 고민이 됐던 건 라임의 문제였는데, 결국 가사를 쓸 땐 어쩔 수 없이 부수적인 입장에서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음유시인’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일말의 자극과 책임감도 주지만 ‘무국적요리’를 펴낸 지금, 그는 작문에 있어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늘 많이 고민하며 씁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소설을 쓰기 시작하길 잘 했단 생각이 드는 건, 노래 안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담겠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다른 통로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고요. 앞으로 어떤 가사와 어떤 형식의 음악이 나올 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과감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백한 듯 강렬한 한 방이 숨어있는 ‘무국적요리’로 반전 있는(!) 남자임을 입증한 루시드폴은 다시 기타 하나 들고 대중 앞에 선다. 2일부터 4월 한 달간 서울 종로의 복합 문화공간 반쥴에서 ‘다른 당신들’이라는 부제의 ‘목소리와 기타 2013’ 공연을 펼친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안테나뮤직]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