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그는 왕씨였다. 고려 때 태어났다면 왕실의 일원으로 떵떵거리며 살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배고픔이 일상이 된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는지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스물 네살에 노파가 하는 주막집에 일꾼이 되었다. 주막집에서 일하는 일꾼을 중노미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처럼 월급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아마 끼니를 거르지 않게 먹여주고 잠자리를 주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노미 노릇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걸 본 노파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꾸짖으면서 책을 빼앗곤 했다. 사실 주막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중노미에게 글이나 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막집 노파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천성이 글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이걸로 성공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시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아마도 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밤이 깊어지면 아궁이 앞에서 글자를 읽었다. 노파는 아무리 꾸짖어도 그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자 결국 후원자로 돌아섰다. 여느 때처럼 일을 끝내고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읽고 있던 그에게 다가온 주막집 노파는 초 하나를 건넸다. 그 후에도 매일 초 하나씩을 주어서 밤에 책을 읽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면 별것 아닌 선심처럼 보이지만, 당시 초가 귀해서 대부분의 가정집에서 등잔불을 썼던 것을 감안하면 노파가 통 크게 쏜 셈이다. 그렇게 하루에 초 한 자루씩을 녹여가면서 글을 읽으면서 글 솜씨는 날로 늘어났지만 주막집 중노미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덕궁 금호문 앞으로 파수를 서러 나가게 되었다. 한양에는 경수소(警守所)라는 일종의 파출소가 곳곳에 있었다. 복처라고도 불리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한양 주민들이 차출되곤 했다. 경수소에서 번을 서는데 마침 달빛이 밝아서 책을 읽기 적당해지자 그는 품에서 서경을 꺼내서 한 장을 읽었다. 맑고 낭랑한 그의 목소리에 때 마침 윤행임이라는 관리가 지나가다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한 밤중에 들려온 글 읽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그는 길을 멈추고 사람을 시켜서 그를 불러오게 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본 윤행임은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진 것을 알고 깊이 감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정조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정조가 그를 궁궐로 불러서 시를 짓도록 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몇 걸음을 떼어놓기도 전에 시를 지었다.
화창한 바람은 신하들의 장막에 불고
빛나는 아침 햇살은 대궐의 붉은 문을 비추네.
걸으면서 시를 지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조식이 형인 조비로부터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읊어보라는 명령을 받고 시를 지었다는 칠보지시(七步之詩)를 흉내 낸 것 같다. 조식이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짓고 살아남은 것처럼 그도 멋진 시를 짓고 정조 임금을 감탄시켰다. 정조는 그를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서리로 임명했다. 사실상 발탁인사인 셈이다. 장용영은 군대였던 만큼 활쏘기와 말 타기로 시험을 봤다. 정조는 특별히 그에게만큼은 시로 대신하라고 명했다. 이후에도 그를 불러 시를 듣고 많은 상을 내려주었으며 얼마 후에는 성균관 소속의 교육 기관이었던 중부학당의 학생으로 삼았다. 장용영 서리로 임명했던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임금이 아끼는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중인들의 시회인 송석원시사에서 참석하기도 했다. 정조는 그를 무척 아꼈는지 무과 시험에 합격한 그를 조령별장에 임명했다. 맨날 정승이나 판서나 봐왔던 우리들에게는 하찮은 벼슬처럼 보이지만 조령별장은 4품 관직에 해당되는 고위직이었다. 중노미 출신의 그에게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공은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공부 하나만으로 어려운 환경을 뚫고 서울대에 들어가고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들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요즘 세상처럼 말이다. 이렇게 글 솜씨 하나로 조선 시대 성공신화를 남긴 그의 이름은 왕태였다.
정명섭(소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