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시간이 흐른다는 게 나에게는 그 애들이 생각나는 게 하루에 100번에서 99번, 98번, 97번 그러다 자꾸 숫자를 잊어버리게 되다가, 머리색깔이 검정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생각이 안 나서 내가 정말 좋아하기는 했던 걸까…우리가 정말 만나기는 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였어.”(영화 ‘연애소설’ 중 지환의 대사 中)
고(故) 이은주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화 ‘연애소설’ 속 지환(차태현 분)의 대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이은주에 대한 생각들이 점점 잊어지고, 종국에는 그녀의 머리색깔이 검정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생각이 가물가물할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남긴 짙은 향기는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기 마련이건만, 여전히 팬들의 마음 한켠에 이은주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남긴 작품 속에서 변함없이 밝게 빛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소통했던 그 시대 그 감성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동아일보 인터뷰 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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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선경 스마트 학생복 모델 선발대회에서 은상을 받아 연예계에 처음 발을 내딛은 이은주는 1997년 KBS드라마 ‘스타트’를 통해 처음 연기에 도전하게 된다. 고등학생 배우였던 이은주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존재감을 알린 작품은 1999년 방송된 SBS 드라마 ‘카이스트’였다. ‘카이스트’에서 차갑고 냉소적인 고슴도치형인 지원 역으로 열연을 펼쳤던 이은주는 경력이 전무한 신인에 가까웠음에도 당대 인기스타였던 이민우, 채림, 김정현, 김민정, 강성연 사이에서 기죽지 않는 연기력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카이스트’에서 냉철한 지원을 잘 표현해서 그럴까. 도회적인 미녀상으로 꼽혔던 이은주의 이미지는 ‘차가움’이었다. ‘카이스트’ 이후 출연햇던 영화 ‘숭어’나 ‘오! 수정’ 역시 쾌활함이나 발랄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표정 없는 얼굴에 새하얀 피부는 그런 이은주의 차가운 이미지를 더욱 부각케 했다. 그러나 생전의 이은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이은주의 차가움 뒤에는 따뜻함이 숨어있으며, 무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으면 주변이 환해졌다고.
데뷔 초 차가운 미녀로 기억됐던 이은주이지만, 그녀의 솔직한 연기는 이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은주와 호흡을 맞추었던 강제규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 대해 “작위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연기를 해서 오래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연기에 임하는 태도도 매우 진지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카이스트’가 이은주를 소개시킨 작품이라면, 이은주의 스크린 데뷔작 ‘송어’(1999)와 대표작 ‘오! 수정’(2000)은 그녀의 진가와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은주는 관객들에게 짙은 감성과 여운을 전해주었을 뿐 아니라, 작품을 선택하는 신중함과 인기보다는 작품성을 고려하는 남다른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동시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송어’를 시작했을 때가 고3이었어요. 제가 다작을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자주 나오면 기대감이 없어지잖아요. 운 좋게도 저에게 도움 되는 작품만 하게 된 것 같아요. 필모그래피에서 빼고 싶은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저의 대표작 ‘오! 수정’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처음엔 과감한 장면들에 겁이 났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땐 이거 안 하면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매일경제 인터뷰 中, 2002)
그렇게 이은주는 단아하고 이지적인 마스크와 타인이 근접할 수 없는 신비한 매력으로 단번에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여배우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그런 이은주에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와 ‘연애소설(2002)’는 내면에 숨어있던 사랑스러움을 이끌어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연애소설’에서 경희 역을 맡았던 이은주는 20대 초반의 여대생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발랄함을 뽐내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도 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애소설’ 속 경희에 대해 “찍어놓고 내가 이걸 언제 했었나 할 정도예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많이 보여주고…찍으면서 민망하기도 했다니까요”라고 말했던 이은주였지만, ‘무척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꼽으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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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는 영화를 사랑했던 여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영화촬영에 몰두한 반면, 브라운관 나들이는 뜸했던 이은주였다. 덕분에 이은주의 대표작들을 살펴보면 영화 ‘숭어’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하얀방’(2002) ‘하늘정원’(2003) ‘안녕! 유에프오’(2004) ‘태극기 휘날리며’(2004) ‘주홍글씨’(2004) 등 대부분이 영화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대표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이름을 알린 작품이 ‘카이스트’였다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해준 작품은 MBC 드라마 ‘불새’(2004)였다.
사랑만으로 결혼했다가 이혼한 부잣집 여자 지은(이은주 분)와 가난한 남자 세훈(이서진 분)이 경제적 상황이 역전된 뒤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을 다룬 ‘불새’에서 이은주는 철없는 부잣집 딸에서, 가세가 기운 후 책임감 강한 비련의 여주인공의 모습까지 소화하며 안방극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이은주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드라마 초반 천방지축 지은보다 후반부의 지은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밝히며 “속은 굉장히 약한데 그걸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 비슷하다. 울고 싶은데 누가 내 모습을 볼까봐 그러지도 못하는 모습도 많이 닮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불새’를 성공리에 마친 이은주는 이후 그녀의 유작이기도 한 ‘주홍글씨’ 촬영에 임한다.
“베드신, 그때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장면 찍고 서럽게 울었다. 정말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쉽게, 또 아무렇지 않게 베드신에 대해 말해 속상했다. 난 배우이기 전에 여자이고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이은주의 유작인 ‘주홍글씨’는 그녀의 죽음의 이유 중 하나로 조심스럽게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주홍글씨’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이은주는 베드신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든 만큼 얻은 것들은 있었다. ‘주홍글씨’에서 한석규와 엄지원 사이에서 어긋난 사랑을 스릴 있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은 이은주는 한 단계 연기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특히 ‘주홍글씨’에서 재즈 보컬리스트로 분한 이은주는 실제 가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며, 이면에 알려지지 않은 끼를 자랑하기도 했다.
“작위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연기를 해서 오래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는 강제규 감독의 말처럼 이은주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과 맡은 배역에 대해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 혼과 열정을 불어넣었다. 각 작품 속에 자신의 일부를 숨겨놓았기 때문에, 팬들은 이은주를 잊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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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 스물다섯에 돌연 자살을 선택한 그녀의 자살동기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모든 것은 추측뿐이며, 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이은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전의 이은주를 아는 이들은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은주 10주기를 맞이해 오는 23일 그녀의 생전 소속사 나무엑터스는 CGV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CGV아트하우스와 ‘故 이은주 추모 10주기-이은주 특별전’(이하 ‘故 이은주 특별전’)을 열어 생전 고인을 아꼈던 팬, 지인,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 하는 추모의 시간을 마련했다.
이번 ‘故 이은주 특별전’에서는 ‘번지 점프를 하다’과 ‘안녕! 유에프오’는 일반 관객들을 초대하여 무료 상영할 예정이며, ‘연애소설’은 영화계 지인과 팬클럽 회원을 중심으로 초청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