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오늘은 어떤 날이었을까.
'오늘裏面'은 이러한 궁금증으로 시작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뉴스와 사건들 속에서 울고 웃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오늘이면은 과거의 오늘이 가진 다른 의미를 추적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소외당하고 잊혀질 뻔한 사실들을 적습니다.
오늘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8년 전 오늘, 4월 8일은 삼성의 투수 임창용이 통산 100승을 달성한 날입니다.
↑ 출처 = MK스포츠 |
위기 상황마다 부르면 나온다 해서 붙여진 별명 ‘애니콜’
34경기 무실점이 이어지며 팬들이 지어준 이름 ‘미스터 제로’
날카로운 ‘뱀직구’를 구사, 절대 지지 않는다 해서 ‘창용불패’라 일컬어지는 투수 임창용.
2007년 4월 8일 대구에서는 두산과 삼성의 접전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선발에 나선 임창용은 당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연평균 135.8이닝을 뛰는 혹사로 인해 2년 전부터 팔꿈치에 통증이 있었고, 꼬박 1년을 재활에 매달린 뒤 맞는 첫 시즌이었습니다. 재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무거운 질문이 그를 눌렀고, 마운드에 선 임창용은 볼을 던졌습니다. 사이드 암에도 불구하고 150km대 직구를 던지는 위력적인 구위는 두산의 타석을 침묵시켰습니다. 5이닝을 3실점으로 막은 그는 시즌 첫 승을 올림과 동시에 개인통산 100승을 따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임창용은 5승 7패 3홀드, 평균 자책점 4.90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팬들은 1997년 해태 왕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임창용의 부활을 기대했지만 그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그해 겨울, 임창용은 삼성을 찾아가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구단은 심드렁했습니다. 임창용은 이미 2001, 2002, 2004 시즌 뒤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무산된 바 있었습니다. 게다가 2005년 오른쪽 팔꿈치 수술 이후 2년간 6승밖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구단 측은 흔쾌히 “갈 테면 가라”했고 며칠 뒤, 임창용은 진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국내 야구 전문가들은 ‘임창용이 갈 팀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부진한 성적에 수술 경력까지 있는 임창용을 데려간 팀은 야쿠르트 스왈로스였습니다. 조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연봉 1,500만엔(당시 1억 2400만원). 전년도 한국에서 받은 연봉(5억원)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보통 국내 선수들이 일본 진출 첫해 연봉으로 최소 8억에서 최대 18억을 받는데 비하면 그의 연봉은 보잘것없는 액수였습니다.
일본인들이 붙여준 임창용의 별명 ‘미스터 제로’는 그렇게 제로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는 한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체된 나를 깨우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 리그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2008년 요미우리와의 개막전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한 임창용은 당시 일본에서 활약 중이던 이승엽을 첫 삼진으로 잡아내며 호투, 시속 156km 광속구를 앞세워 첫 세이브 기록했습니다. 다음날 일본 신문들은 ‘충격적인 일본 데뷔전’이라며 흥분했고 특히 스포츠닛폰은 ‘야쿠르트의 욘사마(ヨン樣)’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임창용은 대한해협을 건넌 지 1년여 만에 일본 올스타 투표 1위에 뽑혀 올스타전에 출전했습니다. 구위도 올라 일본에서 세 번째로 빠른 160km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 출처 = MK스포츠 |
2012년 임창용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루키 리그부터 트리플 A를 거쳐 마이너 21경기에 등판했고, 22와 1/3이닝 동안 13피안타 4실점 평균자책점 1.61을 기록했습니다.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한 임창용은 2013년 메이저로 승격됐습니다. 14번째 한국인 메이저리거이자 37세 최고령 메이저 리그 데뷔 기록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맘때 즈음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살아있네”
임창용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메이저리그 노텐더 방출(의사 없음) 후 작년에 삼성으로 복귀한 임창용은 지난달 31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승 200세이브를 달성했습니다. 이 진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역대 단 한명, 80년대 LG 트윈스의 투수 김용수 말고는 없었습니다.
임창용은 항상 도전했습니다. 커다란 리스크가 있을지언정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뛰어넘고자 더 격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어 절차탁마, 부진이 있어도 매몰되지 않고 손에 로진백을 쥐었습니다.
↑ 출처 = MK스포츠 |
마지막으로 임창용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4월 16일, 많은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었던 한 척의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에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수 백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속보, 거기다가 탑승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사회 전체를 숙연케 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한 KBO에서도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해 전 구단 응원단 운영 잠정 중단이라는 통보를 내렸습니다. 사고 당일은 당연했고 그 이후에도 응원가는 없었습니다.
사고 당시 임창용은 팀의 부진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머리에 조그맣게 글자를 적었습니다. 임창용은 그해 시즌에 하얀 글씨로 ‘희망’이라고 적힌 야구모를 쓰고 등판했습니다. 또한, 지난해 한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하고 주어진 격려금 2000만원을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전액 기부했습니다.
임창용은 많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떠나는 나이임에도 불구, 어떻게 매번 열정이 샘솟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여전히
영상뉴스국 박준상 인턴기자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