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그와는 다른 공을 보게 하라. 누가? 상대 타자가.
스포츠 과학의 눈으로 보면 투수가 시속 150km의 공을 던지는 것과 타자가 시속 150km의 공을 받아치는 것은 상당한 난이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시각과 반응 속도를 고려할 때 후자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를 잘 모르는 비슷한 레벨의 투수와 타자가 맞서면 흔히 투수의 승률이 높은 야구의 속설을 설명해준다. 이 승부의 확률이 변하게 되는 것은 타자가 투수를 점점 알게 되면서 그의 공을 예측하고 반응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투수는 자꾸자꾸 만나는 타자들에게 최대한 더디게 읽혀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 번 만나는 타자에게도 스스로를 ‘처음 보는 투수’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승부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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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위는 단기간에 변하기 힘들지만, 다이내믹한 볼배합은 승부의 결과를 많이 바꿔놓을 수 있다. NC 이재학은 20일 한화 타자와의 수싸움에서 좋은 승률을 거뒀다. 사진=NC다이노스 제공 |
이날 경기 전 배터리 파트너 김태군(NC)은 “역으로 가겠다”며 그동안의 패턴과는 다른 리드를 할 것임을 귀띔했는데, 과연 경기 속에서 달라진 그들의 전략이 빛을 발했다.
예를 들면, 초구 속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2구도 바로 속구, 체인지업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2구도 역시 체인지업을 던졌다. 반면 초구 체인지업이 볼이 되면, 2구는 패스트볼로 바꿨다.
그동안 이재학의 승부 패턴은 초구 속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2구는 유인구로 가져가는 유형이었다. 초구 체인지업이 볼이 되면, 2구는 다시 체인지업으로 스트라이크를 노리는 패턴 역시 많았다.
결론적으로 이날 이재학의 볼배합은 이재학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나온 타자일수록 예측이 꼬이기 쉬운 ‘낯선 모습’이었다.
여기에 보태 하루 전에 던졌던 해커(NC)의 패턴과도 격차가 컸다. 전날 후반의 결정구로 변화구를 많이 봤던 한화 타자들로서는 하루 뒤 NC 배터리의 빠른 속구 승부가 조금 더 낯설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투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경쟁력을 제구력과 볼배합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전훈캠프에서 성장을 위해 가장 많은 투수들이 꼽는 목표가 구속 늘리기와 새 구종 개발인 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비록 적은 구종만 갖고 있어도 투수는 세밀한 제구력과 유연한 볼배합이 있다면 타자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공을 던질 수 있다. 이는 재기발랄한 요리사가 적은 재료만으로도 ‘상상력’이 더해진 여러 가지 레시피의 많은 요리들을 차려낼 수 있는 것과 같다.
흔히 선발투수 이재학의 약점으로 패스트볼-체인지업 위주의 단조로운 ‘투피치’ 유형인 점을 꼽곤 했다. 이날 이재학의 주무기는 여전히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이었지만, 섬세한 제구력과 달라진 볼배합으로 타자들에게 ‘낯선 투수’가 되는 데 성공했다.
투수들이 새 구종 개발보다 훨씬 더 많이, 더 먼저 노력할 부분으로 볼배합에 대한 연구를 권하고 싶다. 타자의 예상과 다른 볼배합으로 타이밍을 빼앗는 싸움은 효과적이다. 습관에 기대지 말고,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상상력을 기울이면서 승부의 전략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SBS스포츠 프로야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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