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규제의 상징이 된 ‘도드-프랭크법’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단숨에 폐지하겠다고 선언하자 월가는 ‘다우지수 사상 최고치 경신’으로 바로 화답했다. 이 법안의 폐지는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기는 했지만 당선 직후 이처럼 속도감있게 추진하리라는 예상은 드물었다.
‘월가를 대놓고 밀어주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규제’ 보다는 ‘기업 활성화’를 택한 것이다. 이 법이 금융산업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려 미국 경기 회복을 저해하고 있다는게 트럼프 당선인의 인식이다.
도드-프랭크법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 금융기관들의 탐욕을 억누르기 위해 오바마 정부가 2010년 7월 발표한 금융감독개혁안이다. 총 3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의 이 법안은 금융위기 때 나타난 문제점을 해소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강도높은 금융 규제 내용을 담고 있다. 파생금융상품의 거래 투명성을 높여 위험 수준을 낮추고 대형은행들의 자본 확충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영역을 엄격히 구분하는 등 금융회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1930년대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이라는 볼멘소리가 월가에서 터져나왔다. 마침 월가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완화적 통화정책 여파로 유래없는 초저금리 환경에 놓였다. 상업은행의 전통적 수익원인 예대마진이 쪼그라드는건 물론이고 자산운용사, 사모펀드(PEF), 헤지펀드들의 이익 수준도 처참히 떨어졌다. 이 와중에 문을 닫거나 기존 인력을 대거 방출하는 금융기관들이 속출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은 CNBC방송에 출연해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만든 도드-프랭크법은 재앙적 수준의 실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법이 사라지는걸 보고 싶다고 밝혔다. 도드-프랭크법이 시장의 유동성과 활력을 떨어뜨리고 금융기관 경영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판단인 것으로 해석된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도 올해 초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대형 은행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며 미 당국의 은행 규제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월가 금융기관 인사들은 “요즘처럼 돈 굴릴 투자처를 찾기 어려운 적은 없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급기야 칼라일그룹은 사모펀드 비중을 줄이고 대출 업무를 강화하겠다면서 변화를 모색했고 골드만삭스 등 전통 강자들도 기존 금융관행을 깨는 비즈니스모델 발굴에 나설 정도였다.
도드-프랭크법 폐기 방침은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월가 금융기관들의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시그널로 해석되면서 10일(현지시간) 뉴욕 증시가 강하게 상승하는 단초가 됐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다우지수는 전날보다 1.17% 오른 1만8807.88을 기록해 지난 8월15일 세웠던 사상 최고치(1만8636.05)을 경신했다. 금융업종이 이틀 연속 4% 수준의 초강세를 이어간 영향이 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의 금융규제 완화가 유럽 은행들의 주가에도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금융당국이 글로벌 은행들에 대한 규제를 더이상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을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트럼프 공포’에 떨던 월가에선 트럼프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10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당초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했던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 회장은 이날 직원들에게 “트럼프의 인프라 투자 방침은 경제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이날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 10년만기 국채금리는 전날보다 0.077%포인트 오른 2.141%을 기록하면서 상승 행진을 거듭했다. 안전자산인 국채 투자 수요가 줄어 국채가격이 떨어진 것(국채금리 상승)이다. 9일(현지시간)에도 미 10년만기 국채금리는 전날 보다 0.23%포인트나 급등한 2.07%를 나타냈다.
월가 전문가들은 의회까지 장악한 공화당의 트럼프 당선인이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국채금리의 추가 상승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재정 확대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연준의 기준금리 상승 확률이 커지게 된다.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온 ‘비둘기파’ 재닛 옐런 연준
트럼프는 도드-프랭크법 폐기 외에도 소비자금융보호청(CFPB)을 폐지하거나 이 기관은 존치하되 예산을 심사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통제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역시 기존 금융규제를 완화하는 조치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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