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본 총리 이후 일본을 이끌어갈 유력 차기주자로 거론되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본격적으로 극우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내에선 국민들의 우경화 추세에 따라 고이케 지사를 포함한 '포스트 아베' 유력주자들이 지지율 견인을 위해 경쟁적으로 극우발언을 내놓으면서 한일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도교신문은 24일 고이케 도지사가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역대 도쿄도지사는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매년 추도문을 보내왔다. 고이케지사도 지난해엔 추도문을 보냈으나 올해 돌연 입장을 바꿨다. 행사를 준비한 시민단체 등은 "(고이케 지사가)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고이케 지사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극우 성향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는게 현지 언론의 전망이다. 고이케지사는 '도쿄대개혁'을 기치로 내걸어 도쿄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는 아직 영향력이 떨어지는게 현실이다. 전국구 정치인으로 입지를 강화하는데 있어 고이케 지사에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우클릭이다.
고이케 지사 뿐 아니라 중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유력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 노다 세이코 총무상 등은 우익 성향 인물로 분류된다.
우익 성향 정치인들이 경쟁에 나서면서 더 강한 발언 등이 쏟아낼 것이 확실시 된다는 전망 때문에 아베 총리 이후 일본에 새 지도자가 들어서도 한·일관계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란 염려가 나올 정도다.
추도식은 '일·조협회' 등 일본 시민 단체가 1923년 도쿄를 비롯한 간토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당시 일본인 자경단 등에 희생된 조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하는 행사다.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살해당한 조선인 숫자와 관련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또 일본 정부도 2009년 보고서에서도 "간토대지진의 사망·행방불명자는 10만5000명 이상이다"며 "이중 몇%의 사람은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올해 행사는 내달 1일 도쿄 스미타구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열릴 예정이다. 고이케 도지사가 올해 갑자기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은 추도비에 적힌 희생자 숫자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란게 도쿄신문의 설명이다.
일본내 극우세력 등은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자 숫자가 부풀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조선인이 일으킨 폭동에 대한 정당방위라는 식의 왜곡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고이케 지사의 추도문이 공개된 후 추모비에 적힌 희생자 숫자 등에 근거가 희박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이케 지사는 "관례적으로 추도문을 내왔지만 앞으로는 내용을 살펴본 뒤 추도문을 발표할지 결정하겠다"고 답했으며 이를 행동에 옮겼다는 해석이다.
고이케 지사 뿐 아니라 올 4월에는 일본 내각부 홈페이지에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관련 조사보고서가 삭제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고이케 지사는 일본에서도 극우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언론사에서 일하다 정치에 입문한 뒤 첫 여성 방위상 등을 지내며 우익의 입장에 선 정치인으로 성장해왔다.
아베 신조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아베 1차내각에선 총리 담당 보조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보다 더 우익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개헌을 주장하는 일본내 최대 우익단체인 '일본회의' 소속이라는 점만으로도 정치 성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역사 왜곡으로 문제가 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이 고이케 도지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는 악연이 많다. 2007년 아베 1차 내각 국가안전보장 담당 총리 보좌관으로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위안부 결의안' 채택 저지를 위한 로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발언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혐한단체인 '재특회(자이니치(在日)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에서 수차례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2011년 재특회 주최 강연에서는 "한국이 다케시마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도쿄도지사가 된 후에도 이러한 성향을 정책에도 반영하고 있다. 전임 도지사 시절부터 추진됐던 한국인 학교 증설을 위한 도 공유지 무상제공을 전면 백지화시켰다. 당시 한국 정부와의 약속을 깼다는 비판이 나오자 "여기는 일본 도쿄다"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도쿄 = 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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