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내가 고등어가 됐다. 아버지는 내가 간이 잘 맞는다며 나를 마구 뜯어 먹었다.’
초등학생 경숙의 일기다. 풍각쟁이 아버지는 냉정하고 무책임한 존재다. 가족을 위해 눈꼽만치도 희생하지 않는다. 늘 쌍욕을 해대고 아내와 딸만 남겨놓고 피난을 떠난다. “전재산인 이 집을 지켜라. 너희는 둘, 난 솔로, 내가 더 외롭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5년만에 돌아온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는 죽도록 밉지만 보고싶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그 애증과 상처는 역설적으로 희극 속에 담긴다.
전쟁 후 돌아온 아버지는 달려드는 경숙에게 “땀냄새 난다. 비키라”며 떼낸다. 또 다시 떠난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이사한 집을 찾아와 “내 니 땀 냄시 맡고 안 왔나. 니들이 야반도주 하믄 내가 못찾을 줄 알았나. 이 깝깝한 년아”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버지의 뻔뻔함은 도를 넘는다. 경숙 앞에서 술집 여자 ‘자야’와 거침없는 애정 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아버지 역시 현대사의 비극이 잉태한 인물이다. 한국 전쟁 때 인민군 완장을 찬 아버지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유년시절에는 의붓 어머니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가출한 후 정처없이 떠돌았다. 한 곳에 뿌리 내리는 삶에 익숙치 않아 제대로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비정상적이지만 그 나름의 방법으로 가족을 지킨다. 수용소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꺽꺽’에게 가족을 부탁한 후 집을 떠난다. 꺽꺽은 경숙을 학교에 보내주고 집을 수리하고 장작을 쌓아둔다. 경숙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정파 남자이기도 하다.
경숙 아버지는 꺽꺽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 낳는데 직방”이라며 지리산에서 캐온 약초를 건넨다. 꺽꺽이 아내에게 선물한 반지를 끼워주고는 참숯 굽는 곳으로 떠난다.
콩가루 집안이 됐지만 남은 식구들은 비정상적인 동거를 한다. 꺽꺽과 경숙 엄마, 경숙, 자야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모진 세상을 견딘다.
“나 혼자 태어나 혼자 살아왔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경숙의 졸업식 때 잠깐 찾아와 “같이 살기에 늙었고 너무 낡은 인생이다. 그걸 알아야 진짜 어른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난다.
경숙은 그런 아버지가 미워 신발 선물을 외면했다.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아버지다. 난산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에 목놓아 아버지를 불렀다. “아부지, 아부지, 경숙이 죽어예, 아부지.”
‘떠돌이 인생’ 경숙 아버지는 이정표를 잃어버렸던 한국 현대사의 초상화 같다. 국민을 전쟁과 가난으로 내몰았던 무능력한 국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행한 역사에 휘말려 생사 기로에 자주 서야 했던 남자들에게 부정(父情)과 책임감은 버거운 숙제이기도 했다. 작가이자 연출가 박근형 극단 골목길 대표는 실제 그의 아버지를 경숙
연기파 배우 김영필(경숙 아버지), 권지숙(경숙 엄마), 주인영(경숙), 김상규(꺽꺽)가 만든 ‘웰메이드 연극’ 공연 시간은 90분. 극은 짧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공연은 4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02)766-6506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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