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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 대모이자 실향민 가수 현미가 탈북녀 박지혜 씨와 2박 3일간 <한솥밥> 녹화를 마친 뒤 두 달 만에 만났다. 여느 모녀처럼 어색함 없이 바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간의 일상과 서로의 건강을 체크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현미 방송(한솥밥) 나가면 되게 좋을 거야. 서로 만나서 너무 좋았거든. (제작진을 보며)얘가 나 미국 간 사이에 약혼을 했어. 지혜야, 내가 축가 불러줄까? 나 축가 아무나 안 해줘.
지혜 엄마(현미)는 저희 친어머니와 외모, 화통한 성격까지 닮았어요. 가끔 나오는 평안도 말투도 70%는 닮으신 것 같고요. (인터뷰 중인 현미를 보며) 우리 엄마 귀가 참 잘 생겼죠? 엄마도 북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 공감되는 게 있어요.
현미 연애감정? 결혼하면 다 없어져. 내가 남편(작곡가 故 이봉조)한테 어떻게 했는지 봐봐. 남편이 수저 먼저 들고 나면 들고. 시댁에 잘 해드리고 항상 순종하는 모습으로 사랑을 받아야지.
지혜 엄마네 집에서 보낸 게 한국 와서 최고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웨딩 드레스도 입어보고, 목욕탕도 가고. 생활, 문화 차이는 적응하겠는데, 외로운 게 힘들었어요. 현재 피부미용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인데,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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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다며 만류하던 것도 잠시, 핸드폰으로 수줍게 예비 신랑의 사진을 현미 씨에게 보여주는 지혜 씨는 영락 없이 결혼을 앞둔 딸의 모습이다. “예비 시아버지랑 남편한테 무조건 잘해. 그럼 너 사랑 받고 살아.” 한국에 온 지 6개월 밖에 안됐지만 ‘쭉쭉빵빵’ 같은 신조어에도 능숙한 지혜 씨. 그녀가 인터뷰 중 깜짝 약혼소식을 전하자, 현미 씨가 축가를 자처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졌다. 숨쉴 때까지는 재미있게 살 거라며 붐비는 공원에서도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노랫가락을 뽑는 현미. 과감한 포즈를 잡아주던 그녀는 느지막히 생긴 막내딸의 등장에 한껏 상기된 모습이었다.
'한솥밥 출연계기가 궁금합니다. 내가 평안남도 평양 실향민 출신이라, 북에서 온 사람들 보면 다 내 가족 같고 맘이 짠해요. 일단 반갑고, 고향 생각도 많이 나고 하니까 딸처럼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수락했죠.
지혜 씨의 첫 느낌은 어떠셨나요? 연예인이라고 하니까 이정재나 조인성을 기대했겠지. 처음엔 날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웃음). 명랑하고 발랄하고 딱 막내딸이지 뭐. 북한에 있을 때 최고급 호텔 상위 1% 호텔리어로 일해서인지 패션감각도 뛰어나고, 성격도 솔직했어요. 한국 온 지 6개월 밖에 안됐는데 거침이 없고 말도 직설적인, 영락없는 서울 아가씨였어요. 어색함이 없었지. 지혜 집에 가보니 먹을 것부터 살림살이까지 엄마의 마음으로 챙기고 쑥스럽지도 않고 먼저 다가가게 되더라고요.
2박 3일 지내보니 어떠셨어요? 집에 처음 갔을 때 가족 없이 하늘 아래 혼자서 사는 거 보니까 마음이 짠했어요. 젊은 나이에 부모 다 두고 와서. 찬장 다 열어봤는데 짠하지. 바로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어. 지혜가 인성이 좋아서 바로 친해졌지. 나는 가수 후배들한테도 ‘선생님’ 말고 편하게 ‘엄마’라고 부르라고 해. 그리고 성격이 중요하지. 후배들한테 다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고 편하게 하라고 하는데 지혜는 성격이 너무 좋았어. 털털하면서 인성도 바르고.
지혜 씨가 만들어준 음식이 맛있었나요? MBN '남心북心 한솥밥'은 북한음식을 함께 해먹으며 서로 공감하는 콘셉트더라고요. 지혜 집에 갔을 때 ‘닭곰’(북한식 삼계탕)을 해줬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다 가난하니까 ‘음식을 즐겨먹는다’는 개념조차 없었지요. 평양에서 대구까지 두 달을 걸어서 내려왔는데, 뭐. 수저, 냄비 이불 두 채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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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지혜가 젊은 나이에 아버지, 오빠, 남동생, 어머니 다 두고 왔잖아. 딸 같고 동생 같고 그래서 울었지 뭐. 1.4후퇴 때 한국으로 힘들게 오던 생각도 나고, 가족 생각도 나고(얼굴을 붉히며). 내가 8남매 중 셋째인데, 북한에 있는 애가 72살, 막내가 66살이야. 내 큰 아들이 55살이니까 지혜는 딸 중에서도 막내딸 나이죠. 이 나라가 이렇게 잘 산다는 게 행복하죠. 북에서 온 사람들은 자다가 실감이 안 나서 볼을 꼬집어들 본대요. (좌중을 둘러보며)우린 다 축복으로 생각해야지. 전 사실 ‘동물농장’ 보면서도 울어요. 금방 낳은 새끼를 깨워서 걷게 하는 거 보면 자식 버리는 인간보다 100배 나은 거지.
지혜 씨 만나시면서 고향 생각이 많이 나셨을 것 같은데요. 내가 평양중앙방송 1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꿈이 무용수라 한국에서도 미8군에서 일하며 연예계로 들어섰지. 북한에 13년 밖에 안 살았는데도 강에서 멱 감고, 뗏목 타고 놀고 하던 게 눈에 선해. 열 세 살 때인 1951년 1.4후퇴 때 내려왔지. 중공군이 쳐들어오니까 일주일만 피해 있으라고 해서 강을 건넌 건데, 그 후로 65년이 흐른 거야. 피난하라고 했으면 가족들 다 데리고 내려왔겠지. 6살 때 헤어진 동생을 50살 때 만났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거 보니 똑같더라고요. 영양 실조에 너무 말라서 잘 씻지도 못한 것 같아 목욕탕 가서 머리를 감기는데 샴푸를 여러 번 해도 거품이 안 나서 너무 속상했어요. 평양 가보니까 국민학교 6학년 때 다니던 학교 자리가 인민대 학
앞으로도 두분은 자주 만나실 건가요? (박지혜)”현미 선생님이 너무 바쁘셔서 시간 잡기가 힘들어요. 어느 날 전화하셔서 “너 오늘 나한테 와라” 그러시면 냉큼 달려가는 거죠.” (현미)”자주 만나야지. 너 축가 불러주려면. 내 축가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웃음) 죽을 때까지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고 그렇게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