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프랑스 파리 극장에서 열린 나라만신(국가 제의를 주관하는 큰 무당) 김금화(84)의 굿판. 공연이 매진되는 바람에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파리지앤들이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서해안 풍어제 배연신굿과 대동굿 기능 보유자인 그의 무대는 한국 무속신앙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 외국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17세에 신내림을 받은 후 갖은 멸시와 탄압에도 무속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도 화제였다. 혼신을 다 바친 굿은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줘 2006년, 2010년에도 파리 무대의 러브콜을 받았다.
오는 9월 20일 오후 3시 파리시립극장 공연도 이미 매진됐다. ‘파리가을축제’ 일환으로 내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앞두고 두 나라가 특별히 준비한 무대다. 이 축제 무대에 서는 명창 안숙선(66)과 현대무용가 안은미(53) 공연 티켓도 이미 다 팔렸다.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와 주간지 ‘패리스 매치’ 등 10개 매체 기자들이 세 사람을 취재하기 위해 내한했을 정도로 파리 문화계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성곡미술관에서 만난 세 사람은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프랑스에서 한국 문화예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만수무강과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만수대탁굿을 선사하는 김금화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굿을 미신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외국 관객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화끈하게 굿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1988년 처음 파리 무대에 섰던 안숙선은 “판소리는 인간들의 희로애락과 우주의 모든 것들을 표현해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우는 프랑스 관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9월 21일 오후 8시 뷔프 뒤 노르 극장에서 판소리 ‘수궁가’ 입체창을 선사할 예정이다.
파리 카페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안은미는 “또 한 번 파리를 점령하려 간다”며 깔깔 웃었다. 그는 2013년, 2014년 ‘파리여름축제’에 초청된 후 3년째 프랑스 무대에 오른다. 그의 대표 공연 3부작 ‘사심없는 땐스’(9월 23~25일 파리시립극장),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9월 27~29일 파리시립극장, 10월 8일 미셸-시몽 극장, 10월 10일 생 쿠엔틴 앙 이브르 극장),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10월 2~3일 크레테이 복합예술공간)는 일찌감치 매진됐다.
안은미는 들뜬 목소리로 “지난해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를 본 프랑스 할머니가 ‘프랑스가 너를 사랑한다. 이런 춤을 추는 한국이라면 가보고 싶다’며 나를 껴안아주셨다. 파리 공연이 끝나면 프랑스 8개 도시 투어를 이어간다”고 말했다.
프랑스 관객들은 한국 문화예술의 전통과 독창성에 열광한다. 프랑스 기자들도 샤머니즘의 힘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김금화는 “굿은 신의 위력을 빌려 무질서를 바로잡고 심신을 강하게 만든다. 굿 속에서 자손과 부부 건강, 승진의 별을 딴다”고 설명했다.
일제 시대 핍박에도 살아남은 판소리의 생명력과 예술성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안숙선은 “일제 때 ‘일어로 소리를 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예술이 아니라 여흥 수단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는 그 애환마저도 삼켜서 예술로 끌어올렸다. 판소리의 성음과 발성, 장단, 빛깔은 어떤 음악에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리에서 들려줄 ‘수궁가’의 매력으로 “위기를 넘기는 지혜가 담겨 있다. 토끼와 자라의 대화 속에 무궁무진한 전략이 숨어 있다”
안은미는 슬픔마저 긍정적으로 정화하는 에너지로 유럽인들을 매료시켰다.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는 60~80대 할머니들을 무용수로 변신시켰다.
그는 “전세계가 안고 있는 할머니 문제를 독특한 방법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화와 어둠도 유머와 해학으로 승화했다”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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