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흑백의 영화가 무대 위에서 색체를 입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를 무대 위로 옮긴 뮤지컬 ‘레베카’는 잘 만들어진 흥행뮤지컬 중 하나로 꼽힌다.
극의 대표 넘버인 ‘레베카’를 비롯해 ‘영원한 생명’ ‘프롤로그’ ‘에필로그’ ‘하루 또 하루’ 등 친숙하면서도 중독성 강한 음악들이 있고, 이를 시원시원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들이 있으며, 잘 만들어진 무대 세트 위를 화려하게 수놓는 무대 효과도 있다.
노래와 춤이 가미되면서 영화가 주는 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와 막심의 러브스토리와, 죽은 레베카를 맹신하는 댄버스부인, 그리고 이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촘촘하게 엮인 스토리는 관객들에게 서스팬스극이 주는 긴장과 재미를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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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뮤지컬 ‘레베카’에 영상이 가미되면서 극의 볼거리는 더욱 풍성해졌다. 극의 시작과 마지막에 영상효과를 더하면서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위에 스크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더한 것이다. 극의 하이라이트 넘버인 ‘레베카 ACT2’에서는 맨덜리 저택이 위치한 음산하게 파도치는 바다를 그리고, 댄버스 부인의 광기어린 화재장면에서는 실제 불을 대신해 영상으로 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극적인 장면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것이 특기인 ‘나’가 그려나가는 그림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고, 각 인물들의 달라지는 감성선을 따라 가며 관객들의 몰입을 높인다.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거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레베카’에서 영상을 빼 놓을 없는 존재로서 자신의 맡은 바 업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고 있다. ‘레베카’이 재연부터 삼연까지, 영상을 책임지고 있는 송승규 영상 디자이너와 만나, 무대 위에서 말할 수 없었던 영상의 비밀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레베카’의 미스터리한 아름다움
공연장이 블루스퀘어에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무대 장치 또한 조금씩 달라졌다. 무대의 높이와 길이, 그리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빈 곳을 채우는 영상 또한 늘어났다. 장소를 옮김에 따라 송승규 영상 디자이너는 그림들을 다시 맞추는 작업을 해야 했고, 이에 맞춰서 모든 영상들을 업그레이드 해야만 했다.
“업그레이드 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다. 익숙해지면서 좋아질 수 있지만, 하는 사람들은 초연보다 재연, 삼연이 더 힘든 것 같다. 조금이라도 앞선 공연보다 업데이트 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또 그렇게 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 조건이 생긴다. 결과물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민과 노력 끝에 탄생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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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규 영상 디자이너가 ‘레베카’ 영상작업을 할 때 떠올렸던 키워드는 ‘미스터리’와 ‘아름다움’이었다.
“연출과 처음 이야기 할 때, 요구했던 키워드는 두 개였다. ‘미스테리한’ ‘아름다움’ 영화 ‘레베카’를 보신 분은 알지만 컬러가 아닌 흑백영화다. 처음 작업을 할 때 제가 신경을 썼던 부분은 무대 위 ‘흑백영화’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송승규 영상 디자이너가 ‘레베카’의 영감을 받은 곳은 바로 ‘레베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단어에서 오는 에너지를 토대로 미스터리한 아름다움을 이끌어낸 송승규 영상 디자이너는 본격적인 무대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품마다 제게 영감을 주는 것이 다르다.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의 경우 음악에 꽂혀있었던 터라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고, ‘팬텀’은 ‘극장 속 아이’라는 구조적인 영역에서 느낌을 받고 작업을 했다.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영상작업도 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신이 되려했던 인간과 인간을 동경했던 괴물’이라는 카피라이터 문구에서 영감을 크게 받았다. 각 작품마다 느끼는 것도 다르고, 영감을 주는 부분이 다른데, ‘레베카’의 경우는 ‘레베카’라는 단어 그 자체에서 주는 힘이 컸다. ‘레베카’라는 단어에서부터 출발을 했고, 여기에 필요한 자료와 색을 찾아봤던 것 같다.”
관객들이 놓치고 가는 부분은 없을까. 사람들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영상 속에 숨겨진 장치에 대해 묻자 송승규 영상디자이너는 ‘색의 채도’를 꼽았다. 극의 화자인 ‘나’의 변화에 따라 채도가 달라진 것이다.
“관객들은 눈치 못 챌 수 있지만 영상을 이용해 맨덜리 저택을 장식한 부분이 있다. 처음 장식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나의 성장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 레베카라는 무언의 압력에 압박을 느꼈던 ‘나’가 사랑의 힘으로 강해지면서 이후 ‘레베카이 신봉자’ 댄버스 부인에게 맞서는데 그에 따라 영상의 컬러 역시 짙어진다. 레베카이 취향으로 꾸며진 집이 나에 의해 바뀜에 따라 영상의 채도 또한 달라진다. 이 같은 부분은 댄버스 부인에게 ‘이 집 주인은 레베카가 아닌 나’라고 말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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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규 디저이너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막심이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는 장면을 꼽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화를 내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막심의 복잡한 심리와 저택에 숨겨진 비밀들이 응집된 장면이라는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나에게 뜬금없이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처음으로 ‘막심은 왜 화를 내는가’라고 의문을 품게 되고, 이후 이 의문은 증폭이 되면서 극적인 재미를 높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과는 별개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오프닝과 엔딩이다. 재연부터 포털이 닫히면서 극이 시작되는데, 영상작업을 하면서 가장 필요했던 장면이라고 생각했었다. 오프닝에서 키워드를 숨기는 느낌으로 작업을 했다면, 엔딩는 모든 박스를 여는 듯한 느낌으로 작업을 했다. 내가 극에서 할 수 있는 미장센이 다 들어간 부분이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장면이 있으면 아쉬운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혹시 작업을 함에 있어서, 그리고 결과물에 있어 아쉬움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나온 대답은 맨덜리 저택의 화재장면이었다. 레베카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댄버스 부인이 광기를 일으키며, 맨덜리 저택을 불태우는 장면으로, 화재신을 통해 극은 절정에 달한다. ‘레베카’가 한국 초연무대를 올리 전, 관객들에게 가장 기대를 모았던 장면이기도 하다.
“화재 장면이다. 사실 가장 다이나믹함을 줄 수 있는 장면이 화재장면인데 그 장면이 실감나게 표현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아쉽다. 극장의 한계도 있어 그 조건 내에서 최선을 다 했지만 조금 더 리얼하게 표현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 우연치 않게 발 들인 공연, 숙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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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규 영상 디자이너가 처음부터 공연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청년은 2004년 뮤지컬 ‘청년 장준하’를 통해 우연한 기회에 뮤지컬과 만나게 됐고, 이후 10년이 넘도록 공연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시간동안 공연에 대한 송승규 영상 디자이너의 사랑은 깊어졌고, 어느덧 숙명이 돼 버렸다.
“아마추어인 상태에서 우연히 공연의 영상을 담당할 기회가 왔다. ‘한 번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시기에, 영상 전공자이기도 하고, 경험 쌓기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우연치 않게 시작한 작업은 의외로 저와 잘 맞았고, 공연과 영상이 융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공연 영상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무엇이 송승규 영상디자이너를 공연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송승규 무대 디자이너는 ‘라이브의 묘미’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영화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라이브가 주는 묘미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관객들과 똑같다. 라이브가 주는 묘미는 어절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작품이 끝나고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는 마치 마약과도 같다. 공연 시작할 때 정말 힘들다. 많이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지쳐서 ‘이것만 끝나고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무대 뒤에서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을 들으면 ‘그래도 공연에 일조를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어느새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다. (웃음)”
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져든 송승규 영상디자이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다. 그중 가장 큰 어려움으로 뽑은 것은 후배 양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배들이 없어진다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고 또 힘든 일이다. 얼마 전에 조명 팀을 봤는데 막내가 서른셋이더라. 저 역시 일을 한지 10년이 됐는데 여전히 막내라는 것이다. 일도 힘들고 페이부분도 충족이 안 되니 후배 양성이 잘 안 되는 거 같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한국의 창작뮤지컬들이 월드프리미어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작품이 해외에 나가서도 됐으면 좋겠고, 경제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면 저작권료를 받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최근 이런 부분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뮤지컬 ‘마타하리’다. 하나라도 외국에서 잘 나간다면 한국의 작품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람이 이뤄진다면 후배 양성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