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비싼 작가’ 김환기(1913~1974)는 활동 시기와 장소에 따라 작품이 크게 구별된다. 일본에서 유학 한 뒤 서울에서 활동하던 1950년대는 산과 달 같은 우리 자연과 달항아리, 여인 등이 화폭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하던 1960년대는 구상성이 다소 줄어들고 압축적인 선과 면이 등장한다. 뉴욕에서 말년을 보내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는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진 추상회화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갑자기 찾아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가의 작업은 즉흥적인 것 같지만 사전에 세심한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이다. 이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드로잉이다. 김환기의 드로잉북을 보면 이러한 변화가 암시돼 있다. 파리에서 머물 때 그는 이미 스케치북에 수없이 점을 찍으며 이미 형태의 기본 요소인 점에 천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역시 드로잉을 통해 하나의 물방울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드로잉은 유화 대작을 앞두고 벌이는 일종의 ‘손풀기’라는 비유가 가능하다. 1976년 드로잉에서 김창열은 종이 위에 연필로 물방울을 그리고 또 그린다. 그 물방울은 연필로 몇 가닥 그은 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멀찍이 떨어져 보노라면 진짜 물방울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를 줄 정도다. 드로잉 한 점에서 대가의 솔직담백한 성정과 여유, 유머, 정교함이 한껏 배어나온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내로라하는 추상화가 8인의 드로잉을 모은 ‘애프터 드로잉’(After Drawing)전이 열리고 있다. 김환기를 비롯해 김창열, 박서보, 정상화, 김기린, 윤명로, 이우환, 이승조 등 화단 대표 추상작가들의 드로잉을 살펴볼 수 있다.
미술 작가가 작품 구상 단계에서 습작용으로 그리는 그림을 ‘드로잉’이라고 한다. 흔히 소묘나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드로잉 자체를 하나의 완성작으로 보는 것이 추세다.
드로잉과 유화를 나란히 걸어 놓은 전시장을 걷다 보면 유화의 강렬함과 화려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드로잉의 소박한 매력에 새삼 빠져든다. 마치 화가의 민낯을 보는 듯 정겨우면서도 친근하다. 드로잉은 결국 작가의 기본기 아닌가.
정상화와 이승조의 드로잉은 습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완성도를 보인다. 전시 자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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