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호철, 끝내 펴내지 못한…‘귀향’
몇 해 전 老작가에게 고향 원산이 어떤 곳인지 물었을 때, 그는 이따금 생각에 잠겼다. 떠난 지 어언 60년이 넘는 그곳을 회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줬다.
“원산 명사십리 뒤편에 참 산들이 많았지. 어머니가 뒷산에 올라 물을 떠다 달빛에 기도를 드리곤 했었어. 그럼 나는 어머니 등 뒤로 슬며시 귀를 대고 체온과 심장소리를 느끼곤 했던 어릴 적 기억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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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19살의 문학 소년은 고향에 돌아와 다신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전쟁도 그의 문학에 대한 의지만큼은 꺾지 못했다. 글로서 슬픔을 달래며 자신의 역경을 <탈향> 등 250여 편의 작품으로 풀어냈다.
6.25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때면 덤덤한 듯하다가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쾅! 쾅!’ 소리를 내며 원산폭격 당시의 끔찍한 참상을 묘사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개인적으론 비극이었지, 하지만 문학적으론 쓸게 많았어. 경험한 게 많았으니까. 작가는 살 아낸 만큼 쓸 수 있는 거야”
그가 평탄하게 살았다면 계획대로 평양의 교대에 진학해 교사로 살았을지 모른다. 원산고등학교의 수재였고, 일찍이 문학선생의 눈에 띄어 대학까지 추천 받았다. 장차 큰 문학인이 될 거라는 말도 들었다. 선생의 말처럼 문학인으로 성공했지만 모든 걸 앗아가 버린 전쟁. 하지만 시대에 대한 원망은 없다고 했다.
“원망, 좌절 그런 건 생각할 틈도 없었지, 하루하루 살아 나가는 것만 생각 했으니까 무념의 상태였어”
선유동의 집필실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살짝 취기가 오른 날은 월남 이후의 생활도 들려주곤 했다. 그는 부산에서 부두 노동, 제면소 직공, 등을 전전했는데, 집에서 나설 때 받았던 돈은 몽땅 책을 구입하는데 썼다고 한다. 끼니 때우기도 힘든 처지에,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미친놈 취급을 했다며 항상 웃었다.
서울로 올라와 미군기관 경비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당시의 설렘과 기대가 그대로 묻어나곤 했다. 처음 <탈향>을 퇴고한 뒤 맛본 성취감, 어렵게 황순원 작가를 만나 그의 추천을 받아 등단을 했던 이야기.
노년의 그는 허리가 좋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는 조그만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다녔다. 지나갈 때면 그의 강단 있는 말투처럼 ‘딱 딱’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는 자택 인근의 북한산을 자주 올랐다. 세월이 흐르며 기력이 쇠해지는 만큼 북한산을 오르는 높이도 점점 낮아졌다. 하지만 언제나 통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고령의 나이도 잊은 듯 했다.
“통일 방안이란게 별게 없어, 남북이 한솥밥을 먹어야해. 자연스럽게 사람이 오가고 만나게 할수 있으면 되는 거야, 내 마지막 소설은 귀향이 됐으면 좋겠어”
추석이나 설 명절이 되면 그는 푸른 녹음이 우거진 집필실에서 제자들과 술을 마시며 실향의 아픔을 달랬다. 이름 없는 소나무에 가족들의 이름을 붙이며 말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어머니의 기일이 되면 집필실 인근 저수지에서 어머니에 보내는 편지를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다.
그는 문학의 힘으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질 수 있는 문학이 남북관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내 소설을 읽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문학도 나름 역할을 하는 거지. 문학은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니까.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문학만이 가능한 부분이 분명히 있어”
[MBN 뉴스센터 한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