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15회에 걸쳐 국내의 1~2기 신도시에 대한 초기 계획과 개발과정, 현재 모습에 이르는 대장정을 진행했다.
이번 시간은 올해로 10년이 된 개성공업단지(이하 개성공단)으로 눈을 돌려 본다.
↑ [2013년 4월 27일 오후 4시께 개성공단에 체류 중이던 입주기업 직원들이 파주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귀환하던 모습. 출처 매경DB] |
지난 2010년 5월 대북지원이 중단된 뒤 남북관계는 급랭했다. 지난해 4월에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개성공단 조업을 중단해 개성에서 근무하는 대한민국 근로자 170여명이 전면 철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현재는 공장이 재가동돼 정상 조업 중이지만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개성공단이 ‘남북 간 경제협력과 화해무드의 장’이 될지 ‘이데올로기로 인한 볼모’로 전락할 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개성공단 태동은 1992년, 서해안공단 합의서 체결이 원동력
1990년대 이후, 전 세계는 냉전 종식과 함께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의 시장 개방이 빠르게 진행됐다. 북한도 이런 국제정세에 발맞춰 1991년 12월 함경북도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로 공포하는 등 외국자본의 유치를 위한 제한적 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두만강개발계획(TRADP: Tuma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은 한국, 중국, 러시아, 몽골 등 5개국이 유엔개발계획(UNDP: UN Development Program)의 지원 하에 두만강 유역을 물류, 교통, 관광의 중심지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두만강개발계획구역은 나진·선봉 특구, 훈춘 특구, 블라디보스톡·울란바트로 특구로 구성됐다.
하지만 성과는 개성에서 얻어낸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경제공동체 구축을 추진했다. 이런 경협무드를 타고 1999년 10월 1일 현대그룹은 북한과 서해안공단 건설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건설지역을 놓고 현대(해주)와 북한(신의주)은 이견을 보인다.
시간이 흘러 2000년 6월15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갖는다. 회담을 통해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합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6월 28일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방북한다. 북한은 개성지역을 공단 후보지역으로 제시했고, 8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몽헌 현대그룹회장이 만나 개성시 일원에 65.7㎢(2000만 평)의 개성공업지구를 건설하기로 전격 합의한다.
한편 정부(한국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의 공동조사단은 2000년 8월4일부터 8월15일까지 평양과 개성 현지를 방문해 개성공단사업을 위한 합의와 개성시 인근 2개 지역에 대해 산업단지 후보지역을 조사했다.
8월22일 현대아산과 북한의 대남경제담당조직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및 민족경제협력연합회는 베이징에서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서와 함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여기서 개성공업지구 65.7㎢ 중 3.3㎢를 개발키로 합의함으로써 개성공단이 탄생하게 된다. 현대아산은 1998년 6월16일 故 정주영회장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 등 개성공단 탄생을 이끌어내는데 공로가 컸다. 현대 측은 당시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아 한국토지공사에 사업 참여를 요청하고, 2000년 11월 10일 한국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은 ‘개성산업단지 사업시행협약서’를 체결하고 개성에 첫 삽을 뜬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시와 판문군 일원으로 서울에서 60km, 평양에서 16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총 면적은 개성공업지구 65.7㎢ 중 공단면적은 26.4㎢이며 나머지 39.3㎢은 생활·상업·관광구역으로 계획됐다.
공장구역 26.4㎢는 단계별 개발방식으로 추진하며 우선 1단계 3.3㎢(약 100만 평)을 2007년 말까지 개발해 공업입주를 완료하고, 나머지 구역은 공단의 인프라, 도로, 공장부지 수요 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공단조성에 필요한 토지는 북으로부터 50년간 임차해 개발 분양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2002년부터 시작된 개성공단 1단계 사업
개성공단 1단계 사업은 황해남도 개성시 봉동 일원이며 면적은 3.3㎢이고 사업기간은 2002년 12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5년간 조성했다. 사업비는 기간시설 설치비 1573억원을 포함 2704억원이었다. 시행역할을 맡은 한국토지공사는 자금·설계·분양을, 현대아산은 시공을 담당했다.
개성공단사업은 2001년 들어서면서 대내외 여건 변화로 대북협의가 중단됨으로 인해 상당기간 진척되지 못했다. 공백기를 거친 개성공단사업은 법적 제도적 기틀이 될 ‘개성공업지구법’이 2002년 11월 20일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시화됐다.
2002년 12월 4일 남북 간에 ‘공장구역 개발업자 지정합의서’를 체결함으로 사업시행이 시작됐다. 2003년 2월 말부터는 ‘개성공업지구법’의 하위규정인 개발규정, 기업창설·운영규정, 세금규정, 노동규정 등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협상에 착수했다.
규정협상 시 남북 간의 입장이 달라 협상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수차례의 협의 끝에 10여개의 하위규정을 제정했다
또한 남한의 문화재전문가 15명과 북한의 문화재관계자 30명으로 구성된 발굴조사팀이 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자문 JNK 개발원 정인택 원장 / 정리 이미연 기자]
[참고] 정인택 원장은 現 JNK 개발원 원장으로 사단법인 도시경영 포럼 부회장과 前 서울시 도시정비과, 한국토지공사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도시개발, 마케팅, 인력개발 등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