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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가을단풍 [매경DB] |
겨울 문턱에 들어서면서 나뭇잎이 하나 둘 소리없이 떨어지고 있다.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을 떨어뜨리며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긴 채 춥고 황량한 겨울을 예고한다. 일반인들은 낙엽을 보며 쓸쓸함을 느낀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숭고하고 장엄하다’고 생각한다. 수만 년 동안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진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한 생애를 마친 나뭇잎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인간 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다.
온도가 떨어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 식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식물잎에 있는 엽록체는 광합성을 통해 포도당을 만든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해 성장하고 자신의 씨앗을 남긴다. 햇빛이 줄어들면 엽록체의 광합성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동물로 비유하면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는 뜻이다. 또한 식물 세포는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온도가 내려가 얼어버리면 세포가 파괴될 수 있다. 식물은 생존을 위해 잎에 있는 엽록소를 분해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 대신 생존을 택하는 것이다.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식물은 낙엽이 떨어지고 새 순이 돋아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을 이어간다. 이유리 기초과학연구원(IBS) 식물노화수명연구단 연구위원은 “녹색을 띠고 있는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녹색이 사라진다”며 “잎이 갖고 있던 빨간색, 노란색 색소가 드러나면서 울긋불긋한 단풍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봄과 여름철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있던 잎이 살랑살랑 거리는 서늘한 가을 바람에도 떨어진다. 잎이 늙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처럼 잎이 떨어지는 현상을 ‘탈리’라고 부른다. 식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화에 관여하는 호르몬이 존재한다. 힘이 남아도는 봄과 여름에는 ‘옥신’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은 식물이 왕성한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을이 되면 잎이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에틸렌’ 분비가 왕성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는 셈이다. 이때 잎에 있는 영양분은 줄기나 가지로 이동하고 기능을 잃어버린 잎은 식물과 분리돼 땅으로 떨어진다. 식물이 불필요하게 많은 잎을 갖고 있는 건 겨울을 나기에 비효율적이다. 잎에서 뽑아낸 영양분으로 식물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뒤 날이 따듯해지는 봄이 오면 엽록소를 다시 만들어 푸른 잎이 피어나게 한다. 이일환 IBS 식물노화수명연구단 연구원은 “잎의 노화는 식물이 오랜 기간 진화를 거쳐 만들어낸 생존전략”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처럼 식물의 노화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가 한창이다. 남홍길 IBS 식물노화수명연구단장이 이끄는 연구단은 2009년 ‘애기장대’에서 노화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아 ‘오래살아(오래1·Oresara)’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애기장대는 잎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잎이 광합성을 하지 못해도 노랗게 변하는 현상이 지연되는 것을 발견했다. 오래살아 유전자 외에 ‘마이크로RNA 169’, ‘오래3’ 유전자 등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식물 노화에 관여하고 있다. 최근 오래살아, 아인3 등 노화관련 유전자가 식물의 엽록체를 파괴한다는 연구결과가 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 유종상 IBS 식물노화수명연구단 책임기술원은 “노화에 관련된 유전자가 많이 발견되면서 지금은 유전자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노화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라며 “빅데이터 연구처럼 ‘노화 유전자 허브’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밝혀진 식물 노화 유전자는 인간에게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사과나 토마토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도 노화 과정이다. 수확한 토마토를 먼 거리까지 이동시키게 되면 에틸렌이 분비되면서 물러져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에틸렌 분비 유전자를 제거한 토마토는 설익은 파란 토마토가 된다. 이를 판매하는 곳까지 옮긴 뒤 에틸렌을 처리해주면 먹기 좋은 빨간 토마토가 된다. 오렌지나 사과도 마찬가지다. 모두 노화 유전자를 활용해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식물 노화 유전자는 인간의 노화를 연구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과 식물 유전자는 상당수가 비슷하기 때문에 식물에서 발견된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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