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과 대륙 중 선택을 요구받을 때마다 영국은 주저 없이 해양을 택했다.”
1957년 시작된 유럽통합의 흐름을 외면하던 영국이 10년 뒤 생각을 바꾸어 유럽연합(EU)의 전신 구주공동체 가입을 희망했을 때 거부권을 행사한 드골 프랑스대통령이 떠올렸던 처칠 영국총리의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자신이 거듭 미국과 충돌하자 그가 미국을 편들며 했던 말이다. 드골이 보기에 영국은 유럽이라는 애인을 언제든지 저버릴 수 있는 믿지 못할 섬나라였고 그래서 처음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영국은 드골이 죽을 때까지 가입을 기다려야했다. 유럽의 기대를 외면한 이번 브렉시트로 드골의 판단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그동안에도 영국 재계가 동요하고 파운드화가 하락하는 현상을 브렉시트의 징후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잔류를 주장한 노동당 하원의원이 피살되면서 조심스럽게 잔류를 전망하는 관측이 우세했는데 정작 뚜껑을 열자 다른 결과가 나왔다.
EU입장에서 보면 캐머런 총리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난 2월 정상회담에서 다른 회원국으로부터의 이주자에 대한 복지혜택 잠정정지까지 받아들였는데 기대를 저버려 아연할 것이다. 유로를 쓰지 않는데도 런던시티가 유럽금융시장의 중심이 되고 런던의 상수도와 공항 관리, 그리고 중앙은행까지 외국인에게 맡기는 자유주의 개방정책으로 번영을 누려온 영국인들이 역설적인 선택을 했다. 비용 대 효과에 대한 냉철한 판단보다 연간 20만 명에 달하는 동유럽, 남유럽 회원국 국민의 이주가 반유럽정서를 낳은 가운데 EU각국의 경제난과 난민문제가 부각된 현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그 실물의 크기보다 큰 파장을 국경너머까지 미쳤다. 16세기에는 헨리 8세가 당시 유럽통합의 중심 격이던 교황청과 절연하며 성공회를 세우고 스스로가 수장이 됐다. 그렇게 기독교 문명사회 전대미문의 대사건을 일으키며 유럽으로부터 고립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후에도 스페인, 프랑스, 독일이 유럽의 패권을 노릴 때마다 이를 막기 위해 개입하고는 다시 ‘영광의 고립’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처음부터 대륙에 발을 들여 미리 재앙을 막지 않고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개입하여 재앙을 키우는 과오를 거듭했다.
그동안 대륙의 유럽인들은 유혈로 점철된 역사를 뒤로하고 공존공영의 시대를 열기위해 국민국가로서의 주권을 포기하고 통합을 전진시켰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바로 그 주권을 도로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조약과 국제적 의무의 네트워크로 얽힌 오늘의 세계에서 주권은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데도 그렇게 했다.
물론, 브렉시트가 가하는 충격은 영국에 가장 클 것이다. 국가분열의 시대를 맞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EU잔류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투표가 다시 이루어져 가결될 것이며 영국과 아일랜드가 모두 EU회원국이라서 도왔던 북아일랜드의 평화도 그 장래를 점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세계를 향해서도 가늠키 어려울 정도의 파장을 미칠 것이다. 무엇보다 서방진영의 약화가 우려된다. 영국의 군사력, 외교력, 가치력이 힘을 잃는데 더해 영국이 맡았던 미국과 EU의 연결고리가 가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브렉시트에 기대를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각지에서 경
[이주흠 명예기자·한국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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