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그랬어요.”
지난 해 1300만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내뱉은 명대사 중 하나다.
그런데 영화 속 무법자가 뱉어낸 안하무인격의 이 대사는 역설적으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의 한국 사회에도 적용된다. 김영란법은 부정청탁·금품수수 행위에 대해 광범위한 처벌 규정을 담고 있다. 사립학교 등 민간 분야까지 포괄하는 데다 법 조항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법 상식까지 깬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응당 있을 수 있는 상식적인 만남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입법 과정에 참여했던 국회의원들이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법”이라고 스스로 인정했던 배경이다.
일반 국민들은 김영란법이 공무원,공공기관 관계자들과 언론사 종사자, 그리고 이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는 일부 기업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법 내용에 대해서도 이른바 ‘3·5·10 법칙’(3만원·5만원·10만원을 넘지않는 음식물·선물·경조사비는 부분 허용)만 지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김영란법과 시행령을 토대로 실제 사례에 적용해보면 합법과 위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일반적인 법 감정이나 상식만으로는 도저히 위법 여부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자녀 생활기록부 언급 자체가 부정청탁 될수도
예를 들어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자녀 교육과 성적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학부모들은 범법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수시전형과 입학사정관제 도입 이후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나 수행평가 등에 매우 민감해졌다. 학생생활기록부는 특목고나 대학 입시 때 당락을 좌우하는 핵심 잣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교육현장에서는 자녀의 생활기록부를 고쳐달라고 교사에게 통사정하거나 생활기록부 작성 단계부터 개입하려는 부모들이 심심치 않게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금품이 오가지 않으면 학부모 입장에선 법적 처벌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청탁의 성사, 금품의 전달 여부와 관계없이 ‘부정청탁’에 해당돼 과태료를 물게 될 가능성이 발생한다.
김영란법은 ‘각급 학교의 입학·성적·수행평가 등의 업무에 관하여 법령을 위반하여 처리·조작하도록 하는 행위’나 ‘권한을 벗어나는 행위’를 청탁할 경우 부정청탁으로 보고, 제3자(자녀)를 위해 공직자(교사) 등에게 부정청탁을 한 사람에게는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부정청탁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모호하다. 단순히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정도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생활기록부 얘기를 꺼내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면 부정청탁의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수십 가지의 표현에 따라 수십 가지 사례가 있을 수 있고 법원 판례가 쌓일 때까지는 누구도 명확하게 부정청탁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송진욱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현재로선 개별 사례가 법 위반인지 아닌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사례마다 조금씩 상황이 다를 수 밖에 없고 이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 판례가 상당수 축적돼야 어느 정도 명확한 기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도 혼란...학부모와 면담 기피현상 우려
일선 교사 입장에서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공직자는 부정청탁을 받았을 때 거절 의사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 동일한 청탁을 재차 받는다면 소속기관의 장에게 서면으로 이를 보고해야 한다. 보고하지 않으면 처벌규정은 없지만 법 위반에 해당한다.
법을 지켜야 하는 교사 입장에선 학교로 찾아온 학부모의 말이 부정청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개별 학부모들과의 만남 자체를 회피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학부모가 성의 표시로 제공하는 커피나 케익, 음료수 등 비교적 낮은 가격의 선물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공직자가 ‘3·5·10 법칙’에 맞춰 선물을 받았을 때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기준금액 이하라도 교사와 학부모는 직무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직무수행 또는 사교·의례 등의 목적’을 벗어나면 과태료 대상이다.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도 “학급 담임교사 등이 성적이나 수행평가 등과 관련하여 학부모로부터 가액기준 이하의 식사 제공을 받는 것은 과태료 부과 대상”이라고 적시했다.
학부모가 2만원 상당의 음료 세트를 들고 학교에 찾아가 교사를 만나고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상담을 했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학부모가 “생활기록부를 고쳐줄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순간 2만원의 음료세트는 교사가 받아서는 안될 ‘수수금지 금품’이 되고 만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공직자는 수수금지 금품등을 받은 경우 소속 기관장에게 지체없이 서면으로 신고하고 제공자에게 곧바로 반환하거나 기관장에게 이를 인도해야 한다.
◆교수에게 졸업 선처 부탁해도 부정청탁 가능성
일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김영란법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또 있다.
졸업을 앞두고 미리 취업한 대학생들이 교수를 찾아가 “시험을 볼테니 제발 F학점만 주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졸업예정자 신분으로 4학년 2학기때 취업한 뒤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F학점을 받으면 졸업을 할 수 없고, 취업도 취소될 수 있다. 그러나 김영란법 시행 후엔 국공립대는 물론 사립대 교수도 김영란법상 ‘공직자’가 된다. 따라서 교수에게 법령이 허용하는 재량권이 없는데도 이런 부탁을 했다면 명백한 부정청탁이 된다.
이 경우엔 학내 규정이 부정청탁 여부를 판가름하는 열쇠다. 상당수 대학교에는 ‘총 수업시간 수의 3분의 2 이상을 채우지 못한 학생은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시험을 보지 못하면 당연히 학점은 F다. 하지만 취업이 결석의 예외 사유가 되는 학교나 학과에서는 교수 재량으로 시험을 허용하거나, 다른 과제로 시험을 대체할 수 있다. 이 경우 교수의 재량권 내에 있는 사항에 대해 부탁을 했으므로 부정청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같은 대학생인데도 학교 규정에 따라 부정청탁 여부가 갈린다는 얘기다. 다만 김영란법은 본인의 이익에 관해 청탁한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규정을 두고 있지 않아 학생은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수는 재량권 범위를 벗어나 성적을 올려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공직자, 골프 ‘약속’만 해도 처벌될 수도
이 밖에도 김영란법에는 엄격한 처벌 규정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공무원은 물론 사립학교 교직원, 언론기관 종사자 등이 직무와 관련된 사람에게서 허용 범위를 뛰어넘는 음식물을 제공받을 경우 김영란법에 따라 2~5배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그러나 과태료를 낸다고 해도 처벌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속 공공기관의 장은 이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반드시 징계 처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기업 임직원이 회사 관련 부정청탁으로 과태료를 내게 될 경우 이 회사 역시 ‘양벌규정’에 따라 같은 액수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된다.
또 김영란법에 따르면 행위가 아닌 ‘약속’도 처벌 사유가 될 수 있다. 공직자가 업무와 관련된 기업 관계자와 골프 약속을 잡았다가 비가 와서 골프장을 못갔더라도 골프 접대를 받기로 약속만 했다면 김영란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김영란법에 대한 오해도 있다. 국회의원들이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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