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공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규모 후원을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대규모 국가 행사 때마다 국회에서 평창특별법 같은 법을 만들어 정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해가면서 기업들을 상대로 돈을 거둘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틀을 갖췄지만 기업들에게 사실상 반강제로 '준조세'를 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르·K스포츠 사태'와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22일 한국전력과 한전 자회사들,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등에 따르면 이들 11개 공기업이 최근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 후원을 결정하기로 한 과정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앞서 평창올림픽조직위는 지난해 4월 한전에 1000억원 현금 후원을 요청한 바 있다. 이후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기업들의 올림픽 후원이 뚝 끊겼다. 올림픽 총 운영비 2조 8000억원 가운데 3000억원이 부족한 상황이 계속됐다. 이에 지난해말 국회는 평창동계올림픽특별위원회와 국회 본회의 결의문을 통해 공기업과 민간금융사가 후원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한편 공기업 경영평가때 기부에 따른 계량평가 점수 하락을 막는 '불이익 방지' 조항을 넣도록 기획재정부를 압박했다. 기재부는 즉시 평창올림픽 후원·지원을 할 경우 불이익이 없도록 공기업 평가 비계량지표 매뉴얼을 고쳤다.
한전은 올해 2월 들어서야 그룹사 사장단 회의때 올림픽 후원 논의를 하는 한편 이희범 평창조직위원장과 두차례 면담을 가졌다. 하지만 당시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한전이 이미 평창 주변 전력설비 사업에 1500억원을 투자한 상황에서 다른 후원을 또 하는 게 맞느냐는 문제제기가 한전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반전의 계기는 대통령이었다. 지난 7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올림픽 G-200 기념행사' 때 "공기업이 평창올림픽을 위해 좀 더 마음을 열고 좀 더 많은 후원을 해주길 부탁 드린다"고 말하자 움직임이 빨라졌다. 한전은 지난 17일 그룹사 사장단 회의를 열어 올림픽 후원 결정을 내렸고, 18일부터 계열사별로 이사회를 열어 이를 의결하고 있다. 수십~수백원을 제공해야 할 공기업들이 아직 이사회 의결도 마무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회사인 한전 사장과 평창 조직위원장이 23일 협약식 퍼포먼스부터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전 이사회는 올림픽 후원의 법적 근거로 '조직위 요청땐 이에 따라야한다'는 내용의 평창특별법 6조 1항과 작년 2월의 국회 결의문, 공기업 경영평가 불이익 해소를 내세웠다. 하지만 한전은 이를 근거로 일찌감치 후원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자발적인 기부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다가 정부가 확실한 '시그널'을 보내자 후원을 결정한 셈이다.
하지만 법적 근거인 평창 특별법 자체가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법조계·학자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법 적용 대상자가 스스로의 재산을 출연함에 있어 자율성을 박탈 당했기 때문에 재산권 측면에서도 헌법·법률에 위배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현직 법관은 "기업의 영업의 자유와 자유시장 질서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조항으로 볼 수 있다"며 "한전은 상장사이기 때문에 주주들의 주식가치와 재산권에 대한 침해도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전과 10개 자회사 후원 결정은 정부와 청와대로부터 후원 압박을 받고 있는 다른 공기업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강원도 소재 공기업인 강원랜드의 경우 이달 초 평창 조직위로부터 500억원 내외의 후원 요청을 받은 뒤 조직위와 후원액 규모를 줄이는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우리의 경우 한전과는 매출액부터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공기업"이라며 "한전이 800억원을 후원하는 게 맞다면 조직위와 후원 협의를 하는 다른 공기업에게도 후원액을 결정하는 데 참고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기업 관계자는 "한전이 보여주기식으로 조직위와 협약식을 하는 상황이라 다른 공기업들은 '아직까지 뭐하느냐'는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조직위와 하루빨리 후원 방식과 금액을 결정해야 할 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에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측은 "정부 차원의 강압으로 한전의 후원이 이뤄진 게 아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한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는 이날 평창 동계올림픽에 현물 후원을 한 기업에 대한 부가가치세 공제 혜택을 주기로 합의했다. 현행은 휘장(엠블럼)이나 마스코트 등 대회 상징물 사용권을 제공받고 재화와 용역을 기부하거나 무상으로 현물을 출자하면 공급가액에 비례해 부가세가 부과된다. 여야와 정부는약 8.26%(109분의 9)의 부가세를 매입세액에서 덜어주기로 했다.
국회의 이번 합의는 사실상 영원무역을 위한 것으로 전례가 없었던 조치다. 영원무역은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 '노스 페이스'의 공급사로 이번 대회의 1호 후원기업이다.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은 지난 4월 평창 동계올림픽 주요 관계자 간담회에서 "기업 마케팅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올림픽을 위해 후원을 약속했는데 부가가치세를 또 내야 한다. 선의로 노력을 한 것인데 덤태기로 비용을 유발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가세를 경감해 달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등 과거 주요 국가 행사 때도 부가세 경감은 없었다.
[이재철 기자 / 김세웅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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