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앞에 장사는 없다. 누구라도 그렇듯 사랑의 신열을 앓게 되면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찌질해지는 순간을 피할 수 없는 법.
‘찌질하다’는 일종의 외계어다. 대개 ‘지지리도 못났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로맨틱코미디물 속 남자 주인공들은 죄다 찌질남이다. 어감과 의미만 따진다면 하자도 많고, 루저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은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며 사랑받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동희(이민기)는 장영(김민희)과 3년 열애 종지부를 쾅 하고 찍었다. 사내연애를 했기에 원치 않아도 매일 마주해야 하는 괴로운 상황. 서로의 생활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별과 현실의 간극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미 내 여자도 아니건만 동희는 영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인다.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새파랗게 어린 여자친구도 만들었는데, 영이 소개팅만 하면 화가 치민다. 참다 못한 동희는 회식자리에서 영에게 빌려준 노트북을 달라고 소리지른다. 심지어 소개팅남 앞에선 영이를 험담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고만다. 동희가 이렇게 된 것은 영의 부재 때문이다. 곁에 영이 없으니 뭘 해도 재미가 없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동희가 사랑받는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5살 여대생 박모양은 “요즘은 허세남이 너무 많은데, 찌질남이 좋은 건 솔직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표현을 원한다”고 했다. 찌질남이 하는 단순하고 순수한 사랑이 밀당에 능한 선수보다 매력적이리는 얘기다.
한편 찌질남 캐릭터가 자리 잡는 데는 2000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한 찌질남’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20대인 상우가 30대 이혼녀 은수와의 연애에서 구조적으로 약자인 것은 당연지사. 열정 가득한 청년의 사랑이 패배로 종결됐다.
하지만 은수를 나무랄 것만도 아니다. 상우의 미숙함이 사랑을 버겁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상우는 어리고 경험이 적다. 자기가 한 밥을 은수가 먹는 걸 보고 싶고, 보고 싶으면 시공을 초월해 얼굴을 봐야만 하는 뜨거움만 가진 남자다.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을 표현한다. 이별을 통보받고 은수의 집에 찾아가 소리 내 우는가 하면 은수의 차를 긁고 펑크를 내는 유치한 복수까지 감행한다.
이쯤 되면 왜 그가 ‘찌질남’ 계보의 첫 주자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미숙한 남자의 무식한 사랑’이 찌질함의 정체인 것. 하지만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의 모습은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극중 광식은 소심한 것은 기본, 센스 없는 것은 옵션이다. 짝사랑 그녀 윤경(이요원 분)에게 고백 한 마디 뱉지 못한다. 내심 윤경도 광식에게 관심 있는 눈치였는데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짝사랑만 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사람처럼 나이스 타이밍마다 마음을 삼킨다.
시간이 흘러 7년 후, 윤경의 결혼식에 나타난 광식. ‘졸업’의 벤이 일레인의 손을 잡고 달아났듯 비장한 표정으로 윤경에게 다가간다. 드디어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나 싶더니 그녀의 손이 아닌 마이크를 손에 쥔다. 이를 본 관객들은 박장대소했다. 구제불능 찌질함이 코미디가 되는 순간이었다.
광식의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용기가 없어 사랑을 포기하고 말았던 각자의 ‘찌질함’을 반성한 것. 이처럼 ‘광식이 동생 광태’는 적극적인 형태의 관람을 이뤄내며 관객을 열광케 했다. 이에 엔딩신에서 광식이 끝내 사랑을 찾은 장면이 등장했을 때, 한편의 성장스토리를 본 듯한 쾌감이 전해지기도 했다.
병운은 이혼남에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은 처지. 그러던 그에게 옛 연인 희수(전도연 분)이 나타나 하루 안에 350만원을 갚으라고 아우성을 친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옛말처럼 그는 특유의 넉살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희수의 돈을 갚다. ‘아는 여자’들을 전전하면서 말이다. 사정이 아무리 급해도 이 방법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자칫 여자 등쳐먹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도 비칠 수 있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병운은 자존심이 없는 모자란 남자(?)같다. 잘못을 인정하는 데 1초면 충분하다. 무릎도 쉽게 꿇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이 앞선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는 것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희수가 먼저다.
헤어져 남이 된 사이. 사실 떼어 먹어도 그뿐이지만 병운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
찌질함만큼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앞뒤 재지 말고 찌질해져 보자. 새로운 사랑이 성큼 당신 앞으로 다가와 있을 것이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염은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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