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자든지 사랑한다든지 그런 말로 프로포즈 하지 않았겠나.”
2003년 3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회상한 프로포즈 장면이다. 단 한 번 뿐인 프로포즈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통큰 사나이’ 김 전 대통령에게 누구보다도 꼼꼼한 손명순 여사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가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다.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근무하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국회 부의장을 맡았던 장택상 전 국무총리 눈에 띄어 장 부의장의 비서관이 됐다.
그러던 중 김 전 대통령은 조부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김 전 대통령의 조부는 건강했다. 배필을 찾아주기 위해 집안에서 조부의 투병을 핑계로 김 전 대통령을 고향집으로 부른 것. 김 전 대통령은 부친 지인의 소개로 세 명의 여성과 맞선을 봤고, 이 중 세 번째로 맞선을 본 손 여사와 1951년 3월 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당시 손 여사는 이화여대 약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재학생의 결혼을 금지하는 당시 이화여대 교칙 때문에 손 여사는 퇴학 위기를 무릅쓰고 ‘비밀 결혼’을 올렸고 주위의 도움 덕분에 첫 아이를 낳고도 졸업할 때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얼핏 무뚝뚝해보일 수 있는 김 전 대통령이지만 손 여사에게만큼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함께 침대에 누울 때마다 손 여사에게 “맹순이(손명순 여사를 이렇게 지칭) 잘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의 사랑에 손 여사는 65년 동안 ‘조용한 내조’로 보답했다. 많은 측근들은 “손 여사의 내조가 없었다면 김 전 대통령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정치 9단’이라면 손 여사는 ‘내조 9단’일 것”이라고 말한다. 김 전 대통령 역시 생전 손 여사에게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편인 저를 높여줬다”며 “화를 잘내는 저에게 언제나 져줬고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다”는 말로 고마움을 드러냈다.
손 여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헌신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전 당시 그를 취재했던 기자들이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을 때면 기자들에게 따뜻한 시래깃국과 갈치구이를 차려주던 ‘안주인’이 손 여사다.
헌신적인 내조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할 때는 확실하게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1983년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며 23일간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손 여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김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 소식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게 했다.
청와대에 입성한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에서는 ‘가장 조용한 퍼스트레이디’로 꼽힌다. 청와대에서 생활했던 5년 동안 손 여사는 청와대 수행원, 운전기사, 여성 직원들을 위한 식당이나 휴게실을 만드는 등의 활동만 했을 뿐 대외적인 활동에는 나서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손 여사의 내조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다. 2011년 3월 열린 결혼 60주년 회혼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손 여사에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두 가지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과 60년 전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며 “맹순이(명순이)가 예쁘고 좋아서 60년을 살았지”라고 말했다.
65년을 함께 한 손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22일 빈소에서 기자들에게 “쇼크가 올 것 같아서 (서거 때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못했다)”라며 “제가 아침에 말씀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손 여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내쉬며 평소 타지 않던 휠체어를 타고 빈소를 찾았다. 빈소 내실에서 6시간 가량 머물다 자택으로 돌아간 손 여사는 “안 추웠는데 춥다”며 65년을 함께 한 고인을 떠나보냈다.
[정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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