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가 폴 케네디는 저서 ‘21세기를 위한 준비’에서 15세기 이후 적자생존이 원리인 국가주의에 대항해 시장과 개방의 원리로 더 큰 풍요를 추구하려는 자유주의가 맞서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국가이기주의가 위기를 초래할 때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후퇴했다고 갈파했다. 또 초국가화의 진행으로 퇴조는 했지만 여전히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국가정체성의 중심이라서 민주국가에서 조차 배타적 국가주의와 원리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세계화로 국가이기주의를 극복해온 세계가 그 역풍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진단한 것이다.
◆증오와 이기심에 밀리는 합리주의
독일에서 히틀러가 득세한 배경은 민생파탄, 이에 따른 국민의 반체제, 반기득권 정서, 여기에 대응하지 못한 정치의 실패, 독재자의 본색을 놓친 대중의 무지였다. 나치즘은 물론, 이태리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도 정치의 선동과 대중의 부화뇌동이 만든 합작품이었다. 시대상황은 다르지만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 그리고 오늘의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이 안고 있는 문제도 본질은 비슷하다. 국민은 길게 본 국익과 대의보다 당장의 생활을 우선하며 자기들 간의 격차에 대한 반감과 이주자들이 부른 박탈감은 그 화살을 바깥세계로 향하게 한다. 외정(外政)이 내치(內治)의 연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명한 듯 비치는 가치에 끌리면 선동의 정치가 파고든다.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본래 친EU였다. 그런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후계자가 되려는 꿈이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에 의해 막히게 되자 보수당 다수론인 브렉시트를 업기로 했고 이것이 적중한 것이다.
유럽 각국에서도 종래 정치의 주류를 이루던 좌우의 합리주의 중도파가 밀리고 있다. 확신과 용기가 없는 것으로 비쳐 신뢰를 잃는 반면, 비용 대 효과의 원칙을 무시하며 간명한 목표와 단호한 행동의지를 어필하는 영합파가 득세한다. 대의정치를 보완할 직접민주주의라며 각국이 다투어 의사결정과정에 끌어들인 국민투표가 관점이 균형을 잃은 유권자의 투표행위로 국제합의와 신의가 간단히 무시되는 현실도 있다.
브렉시트 이후에 대한 우려는 국제사회에 나타나는 불길한 흐름 때문이다. 지난 70년간 지구촌의 안정과 공존공영을 위한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이기주의, 고립주의에 기우는 모습이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균형감각을 평가받아 대다수 외국인이 선호하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도 그 경향을 내비친다. 아태지역 12개국이 어렵게 타결한 자유무역협정(TPP)을 무산시킬 태세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고립주의로 돌아선 것이 대재앙(제2차 세계대전)의 출현을 방조했던 역사를 잊고 내향(內向)의 경제내셔널리즘에 경사하는 것이다. 영국사가 니알 퍼그슨이 저서 ‘미 제국의 흥망’에서 지적한 것처럼 잦은 선거가 근시안의 정책을 낳는다.
20세기 초까지의 영국의 고립주의, 20세기 전반의 미국의 고립주의는 소득없는 남의 다툼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이기주의 때문이었으나 나중에 자기희생이 더 커진 경험이 반면교사가 되어 고립주의를 벗어났다. 반면 오늘날 고개드는 고립성향은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뜻이라서 극복이 어려워 보인다. 모두가 도하 라운드 타결이 공동의 번영으로 향할 자유무역 확산에 필요하다면서도 이기주의에 흘러 지역단위협정을 우선시키는 것과 비슷한 폐단이다.
그런대로 안정적이던 석유시장도 점유율에 매달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기주의로 불확실성이 커졌고 성장을 우선하여 인위(人爲)에 가깝게 환율을 관리하는 아베노믹스도 타국의 피해를 돌아보지 않는다. 안보질서를 흔드는 움직임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중국은 과거 미국이 서반구에 적용했던 배타적 먼로주의를 서태평양에 자기 몫으로 적용하여 통항의 자유를 제한하는 패권적 위상을 세우려 한다. 헌법해석을 자의적으로 바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키로 한데 이어 부전(不戰)조항마저 없애 밖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하려는 일본도 가해의 역사를 잊은 모습이다. 망각에 빠져들기는 유럽도 마찬가지다. 좌우의 극단주의로 재앙을 겪었으면서 극우와 내셔널리즘, 국가주의가 다시 고개 들고 몇 나라에서는 정권까지 잡았다. 전세계 각지에서 전개되는 ‘각자도생’의 질주가 브렉시트로 날개를 달았다.
◆우려되는 강대국들의 혼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류 국제사회 흐름은 세계화였다. 국제협조와 통합으로 물건, 돈, 사람이 국경을 넘나들며 번영을 확산시켰다. 유럽이 선구자였다. 숙적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토대가 되어 프랑스가 정치로 주도하고 독일이 경제로 뒷받침했다. 지역통합이 명실상부했던 유일무이한 성공사례였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어 역학관계가 바뀌면서 나중에 동참한 영국의 존재가 중요해졌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균형추가 되었다. 그랬던 영국이 빠지면 균형은 크게 독일로 기운다. 영국이 대표하던 자유주의도 퇴조하면서 역사의 채무자 독일이 아무리 조심해도 독보적 위상은 그대로라서 유럽으로서는 망조(亡兆)에 다름 아닌 구시대형 “시기심의 체계”가 부활할 수 있다. 헬무트 콜 서독총리가 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자기민족성에 대한 의구심이었다지 않는가?
브렉시트는 지도자들의 성향도 작용하는 미-중, 미-러 간의 역학정치(Power Politics)도 부추길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덩샤오핑의 유산인 분권정치의 틀을 깨며 권력을 집중시키고 권위주의적이라며 경원시되던 ‘핵심지도자(Core Leader)’, ‘시 아저씨(Uncle Xi)’ 까지 쓰게 하며 개인숭배 취향을 드러낸다. 반면 개방과 자유화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국영기업개혁 등을 통한 성장감속 추세의 극복, 농촌출신 도시노동자 처우 개선 등 난제 해결은 미루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권력의 정통성을 쌓을 출구를 바깥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브렉시트로 서방 진영의 결속이 이완될 것으로 판단해 공세 고삐를 당기면 동아시아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 피해의식과 감상주의가 뒤섞인 독특한 세계관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은 핵무기 사용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나쁜 경제가 좋아질 길을 찾기 어려워 국민이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대국의식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러시아에 강경한 영국이 EU에서 빠지면 온건론에 기우는 독일, 프랑스에 접근하여 서방의 보조를 흔들려할 것이다. 그리고 발틱3국 등 구소련 출신 국가들에 간섭을 꾀해 긴장이 고조되면 파장은 동아시아도 피해가지 않는다.
◆한국의 선택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과오의 반복을 피하려면 역사의 흐름을 호흡해야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그대로 놔두면 미래는 어떻게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분석해야 한다. 또 그런 비극을 피하려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야한다. 한국이 현대사에서 거듭한 과오는 세계조류에 어두워 초래되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이고 자원과 시장을 해외에 기대는 한국은 바깥세계를 향해 섬세한 안테나를 가동해 정세의 흐름을 빠르고 정확히 읽고 적응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브렉시트가 한국에 던지는 첫 번째 교훈은 발상의 전환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발생 가능한 새 조류에 맞추려면 그간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던 일들까지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분화추세가 강해질 세계에서 정책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 한층 넓은 외교의 지평을 뜻한다. 현재의 한반도가 긴장과 대결의 장(場)이라면 그래서 더욱 화해와 공생의 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의 전환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 북한이 핵무장을 향해 내달리는 현실에서 계속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북한지도자의 언행이 매우 불안정한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관념의 유희가 악순환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채찍과 함께 당근도 적극 구사하는 양면전략이 필요하다.
브렉시트는 한 나라의 지배적 사회가치도 생각케 한다. 중요한 반면교사는 영합주의 정치와 대중적 부화뇌동의 위험성이다. 한국정치도 세계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뻗어나며 유권자를 현혹시키는 배타적 이기주의 간판에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진취, 관용, 그리고 개방이 가치인 열린사회를 지향해야 나라가 세계로 뻗고 세계에서 인적, 물적 자산을 끌어들여 번영을 이루고 높은 위상을 누린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영국이 나치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이던 19
[이주흠 전 외교안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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