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결국 '순교의 길'을 택했다. 지난달 친문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탈당한 김 전 대표는 5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날까지 자신을 따르는 현역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한 최명길 의원 한명 뿐이다. 대선까지 불과 34일 남은 상황에서 김 전 대표의 출마선언은 좋게 말하면 '순교',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미친짓'이나 다름없다.
김 전 대표는 이처럼 가시밭길이 뻔한 대선전에 뛰어든 이유를 "우리 곁에 큰 안보위기, 경제위기가 다가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위기극복의 답이 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 전 대표는 문 후보를 향해 "위기 상황을 수습할 대통령을 뽑는 것인데 지난 세월이 모두 적폐라면서 과거를 파헤치자는 후보가 스스로 대세라고 주장한다"며 "'3D 프린터'를 '삼디 프린터'라고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정 책임자에게 무능은 죄악"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안 후보를 두고선 "어떻게 집권할지도 모르면서 여하튼 혼자서 해보겠다고 한다"며 자강론과 독자노선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 전 대표는 "적폐 중의 적폐, 제1의 적폐인 제왕적 대통령제는 이제 정말 끝내야 한다. 3년 뒤인 2020년 5월에는 다음 세대 인물들이 끌어가는 새로운 대한민국, 제7공화국을 열겠다"며 임기 단축 공약을 내세웠다. 3년 내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로 개헌을 완수해 국정운영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고 자신은 미련없이 물러나겠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김 전 대표는 또 "1987년 개헌 후 지난 6명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다"며 "이건 명백히 제도의 문제다. 사람의 문제라면 어떻게 6번 연속 실패하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대표는 그동안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대선전략을 수립해왔다. 홍 전 회장은 김 전 대표에게 정책그룹을 지원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와 홍 전 회장의 관계를 잘 아는 한 인사는 "홍 전 회장과 가까운 학계 인사들이 김 전 대표의 정책개발을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사견을 전재로 "경제분야에선 민주당의 최운열 의원이 주도하고 외교안보 분야는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 4차산업분야는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 등이 나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위 전 대사와 이 교수는 홍 전 회장이 주도한 중앙일보 리셋코리아팀에서 각각 외교안보분과장과 시민정치분과위원을 맡고 있다.
이제 김 전 대표 앞에 놓인 숙제는 대선을 불과 한달여 앞둔 시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개헌세력을 규합해 낼지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보수진영 후보들의 지리멸렬한 만큼 이들을 설득해 간판자리를 꿰차는 게 급선무다. 지난달 31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한국당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각각 4%와 2%에 불과했다. 고사위기에 몰린 보수진영으로선 김 전 대표가 보수·중도진영의 대표주자가 돼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경우 후보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른정당과 한국당과 연대가 성사되면 곧바로 국민의당과 연대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김 전 대표는 오랫동안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와 만나 연대에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4일 국민의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안철수 전 대표의 지지율 상승세가 가팔라지면서 국민의당 내에선 '단독승부론'이 힘을 얻는 분위기다.
김 전 대표의 우군이 되어줄 민주당 내 비문계의원들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최명길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해 김 전 대표를 돕고 있지만, 김 전 대표가 후원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던 이언주 민주당 의원은 김 전 대표의 대선출마 직전 언론을 통해 "6일 탈당해 국민의당에 입당하겠다"고 밝히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이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선 이 의원의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오른 반면, 김 전 대표의 대선출마는 5위선에 머물렀다.
그동안 김 전 대표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민주당 내 개헌파 모임인 '경제민주화와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도 아직까진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이 모임에 속한 의원 8명은 5일 조찬을 함께 하면서 김 전 대표의 대선출마 현장에 출동해 힘을 실어주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당 대선후보도 선출된 상황에서 당을 떠나신 분의 출마선언 현장에 얼굴을 비치는 게 부적절할 수도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실제 김 전 대표의 출마선언 현장에 나타난 현역 의원은 무소속 최명길 의원과 민주당
결국 관건은 지지율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김 전 대표는 현재 지지율도 거의 안나오고 따르는 정치세력도 없다"면서 "최소 10%는 나와야 연대 추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수현 기자 / 김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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