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었습니다.
교황이 나흘간 보여준 말과 행동은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지만, 말과 행동은 가장 낮은 곳을 향했습니다.
높은 권위를 지녔지만, 그 권위는 약자와 시민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권위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가난한 자를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가난한 자를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14일 한국 주교들과 만남)
국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국민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떨까요?
국가 권력에 의해 혹시 국민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은 없는지요?
윤 일병 사건도 어찌 보면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권력이 국민을 희생양 삼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도 여전히 비일비재합니다.
선거 때는 한없이 작아지는 정치인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한없이 커지는 일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습니다.
무슨 비리, 무슨 뇌물, 무슨 의혹의 한가운데는 늘 정치인들이 자리하고 있는 게 바로 한국 사회입니다.
그런 권력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 진실을 가리고 무언가를 날조합니다.
평범한 시민은 그것이 거짓인지, 참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인터뷰 : 프란치스코 / 교황 (지난 2월)
- "우리는 모두 전형적으로 음모를 꾸미고 헛소문을 만들어내고 파벌을 만들어내고 편파적이며 우선권을 가지려고 행동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교황의 말과 행동에서는 가식이 아닌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교황이 방탄차가 아닌 국산 소형차를 타고 나타난 것 자체가 그를 방증합니다.
서울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세월호 유족을 만나 위로한 것도 그러합니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는 유족들이 건넨 노란 리본을 달고 나왔고, 직접 세례를 해달라는 유족의 전례 없는 요구에도 응했습니다.
진심으로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단식 농성을 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만나기조차 어렵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고서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들의 누군가와는 달랐습니다.
▶ 인터뷰 : 프란치스코 / 교황(15일)
-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이들과 국가적인 대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 인터뷰 : 이호진 / 단원고 고 이승현 군 아버지
- "아이들을 위해서 잊지 마시고 기도를 부탁한다고 진심으로 부탁했고, 교황님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제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정치인과 주교 등 높으신 분들을 만나기보다 장애인, 환경미화원, 시설관리인들을 만날 때 더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위안부들을 만나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졌습니다.
▶ 인터뷰 : 강일출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 "너무 고맙지요. 교황님이 우리 할머니들이 강제로 일본사람한테 끌려갔다고 교황님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거야.
우리 사회가 약자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기주와 물질주의 때문이라는 교황의 말도 여러 의미를 던져줍니다.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
우리 사회는 지금 성장과 실용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습니다.
성장을 위해 약자들에 대한 분배는 조금 뒤처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원칙보다는 실용이 앞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 월호 참사가 발생했는지도 모릅니다.
▶ 인터뷰 : 프란치스코 / 교황(17일)
-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낮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소통이 이뤄지고, 그들을 위한 애민 의식이 싹틀 수 있습니다.
교황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인터뷰 : 프란치스코 / 교황
- "대화를 위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려 깊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17일 아시아 주교단과 만남)
비록 주교단에게 한 말이지만, 이 말을 듣고 뜨끔할 위정자들이 많이 있을 듯합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독백이 존재합니다.
우리 지도자와 정치권은 그들만의 대화를 하느라 바쁩니다.
소통의 부재는 정치권의 해묵은 단골 메뉴지만 단 한 번도 속시원히 풀린 적이 없습니다.
국민과 소통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교황은 떠났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4박5일의 흔적도 곧 사라질 겁니다.
교황이 지적한 우리 사회의 숙제들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는지 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로는 충분했습니다.
다음에 또 어떤 교황이 한국을 찾을지 모르지만, 그 교황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숙제가 많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