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의원 선거날, 난 비록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졌지만 횡재 한 가지를 했다. 무려 39개의 기저귀를 득템 한 것이다. 투표를 마치고 떡하니 나오니 한 아주머니께서 쭈빗쭈빗 다가오신다. “저기요”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날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기, 기저귀 쓰시나요?”라는 말에 귀가 번뜩! 뒤돌아보니 인상 좋게 생기신 아주머니께서 기저귀 한 박스를 들고 계셨다.
아이 돌보는 일을 한다는 아주머니는 해당 집의 아이가 기저귀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돼 누군가를 주기 위해 투표 장소에 기저귀를 가지고 나오셨다고 했다. 원래는 40개 들이였는데 하나는 썼다며, 그래도 새 것이나 다름없으니 쓰겠냐고 물어보시는 아주머니께 난 “그럼요, 너무 잘 쓸게요”라고 손부터 뻗었다. 돌쟁이 아이를 안고 나온 투표장에서 아주머니가 건넨 뜻밖의 선물은 먼나라 얘기와 같은 정치보다 훨씬 날 더 기쁘게 했다.
꼭 ‘공짜’라서 기뻤던 것은 아니다. 본래 내 성격이 공짜를 좋아하질 않는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얻으면 (아무리 그 상대방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라도) 다시 갚아야한다는 빚진 마음이 싫어서다. 그래서 남에게 신세 질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편이다. 육아 초기에 이런 아주머니를 만났다면 거절했을지 모르겠다. ‘왜 준다는거지? 뭐가 잘 못된 것은 아닐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런지, 내가 뭘 해줘야하지?’ 등 의문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14개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난,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라도 육아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더 냉큼 받았다. 그냥 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투표 장소까지 챙겨나와 아이를 안고 오는 엄마들만을 기다렸을 아주머니의 마음이 참 예뻤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란 말을 줄여 만든 ‘아나바다’. IMF를 겪으며 한 때 유행한 아나바다 운동을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체감하고 있다. 지금 성호가 입는 옷, 신발, 모자, 매일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여러 책, 카시트 등 대부분은 남들에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새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출산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이했다는 기념으로 건네받은 이 선물들은 도무지 값을 매기기가 어렵다. 육아를 하며 아껴 쓰고, 어려운 와중에 남과 나누려 하고,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이 더 요긴하게 쓸 수 있게까지 한 아나바다 운동의 결정체여서다.
첫 아이를 가진 난 육아용품 하나하나를 새로 사기 바빴다. 하지만 이내 새 것만을 고집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 앞에 비싸게 주고 산 옷은 정말로 얼마 입지 못하고 옷장 속에 고이 간직하게 돼서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사 줘도 며칠 뒤면 아이는 싫증을 내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발육을 도와주는 아기 체육관과 같은 놀이기구는 왜 그렇게 부피가 큰지, 2~3개만 마루에 놔둬도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남들이 산다기에 나도 따라 사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점차 커졌다.
그럴 때 친구나 육아 선배들이 건네주는 옷과 장난감들이 얼마나 요긴하던지. 선물받을 당시에는 언제 입힐 수 있을까 생각했던 넉넉한 사이즈의 옷도 쑥쑥 자라는 아이 덕분에 어느 새 꺼내 입으며 옷맵시를 자랑했고, 한 계절 앞서 받은 옷들은 옷 걱정없이 제 계절을 나게 도왔으며, 늘 새로운 장난감을 찾는 아이에게 잊을 만할 때쯤 꺼내보이는 헌 장난감들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받기가 참 어려웠다. 미안해서다. 또래보다 결혼이 늦었던 탓에 난 친구나 선배들의 출산 소식을 들어도 축하 인사만 전했을 뿐, 뭐하나 건넨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육아를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엄마가 된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들이어서 더욱 미안했다.
빚진 마음에 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없는 지 주변을 돌아보게 됐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 역시 아나바다 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비단 아기용품 뿐 아니라 그릇, 가방 등 일상의 용품까지 확장해 나보다 더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됐다.
미안함은 덜고, 베풀고 난 뒤 내 마음은 한층 풍성해졌다. 헌 것이라도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가씨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다. 특히 엄마와 육아라는 공통분모로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헤아리다보면, 육아의 어려움을 쉽게 나눌 수 있어 더욱 좋다. 내 아이가 쓰던 물건을 공유하다보니 엄마들 사이 이야기꺼리가 늘게 되고 이런 저런 속깊은 얘기가 오갈 수 있다.
내 돈 들여 산, 또 내 아이의 체취가 남아있는 물건들을 나눠쓰고, 바꿔쓰는 일이 쉽지는 않다. 챙겨서 주는 일이 귀찮기도 하고, 어쩐지 남이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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