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께 숙명여자대학교의 익명 페이스북 게시판에는 ‘성차별을 방치하는 숙대를 강력히 규탄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게시글에는 ‘숙명인들이 수업시간에 들은 성차별 발언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교수들이 수업시간에 얘기한 듯한 발언들이 담겨 있었다. “낙태권은 사실상 여자들 몸매권 옹호 아닌가”, “여자는 애를 낳지 않으면 군대를 가야 한다, “여자는 남자 잘 만나 시집 잘 가는 게 제일”등의 성차별 발언 고발 게시글이었다.
고발자들은 자신을 ‘숙명여자대학교 여성학·젠더정치학 동아리 SFA’라고 본인들을 소개했다. 숙대 SFA는 자신들을 ‘학내 성차별 고발동아리’라고 말한다.
대학가에서 이른바 ‘고발동아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총학생회나 학내 신고기구들이 하던 일을 학생들 스스로 모임을 결성해 해결하겠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대학가 고발동아리 활동은 미국에서도 최근 활발하다. 지난해 11일 미국 하버드대학교 반(反)성희롱 동아리 ‘우리 하버드인은 더 잘할 수 있어(OHCDB, Our Havard Can Do Better)’는 교내 총선거를 실시해 하버드대 ‘성희롱 방지 계획안’ 작성을 이끌어 냈다. 캘리포니아 시에라 대학의 경우 ‘페미니스트 액션 클럽(FAC)’이라는 여성비하 고발동아리를 만들었다. 이 동아리는 성차별적인 발언 등 성희롱을 당한 학생들이 가해자들에게 일종의 ‘경고장’을 전달하는 고발운동을 시작했다.
한국 대학가의 고발 동아리 활동에는 올해 소위 ‘단톡방’ 사건으로 알려진 대학가 언어성폭력 문제가 촉매 구실을 했다. SFA 이슬(23) 회장은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에서 남학생들이 카톡 대화방에서 여성들을 비하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우리도 교수들의 부당한 성차별실태를 알리고 개선하기 위해 고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숙대에는 SFA와 같은 고발동아리가 2개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양대에서도 여성주의 동아리란 이름으로 ‘월담’이 고발활동을 시작했다. 이 동아리는 지난달 26일 대자보를 통해 한 교양과목 교수의 여성비하 발언들을 공개했다.
월담은 이후에도 페이스북으로 ‘강의실 안 숨은 혐오 찾기‘라는 여성혐오 발언 교수 고발운동을 벌이고 있다. 월담은 타학교 동아리들과 연대해 정부와 사회를 상대로 잘못된 정책에 대한 시정 목소리도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경찰대에 여성 신입생 비율을 확대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불수용한 경찰청에 대해 연대성명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안에 반발하는 연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모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게 ‘월담’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학생회의 위상 추락도 고발 동아리 활동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적어도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총학생회에서 학생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남성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데다 총학의 위상 자체도 최근 학생회비납부거부 운동까지 일어날 정도로 지지도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A대학 고발동아리 소속 한 학생은 “구성원의 다수가 여학생이고 여학생들이 학내 가장 절실한 부분이 동기들의 언어성폭력과 교수들의 성별에 기반한 갑질 아니냐”며 “이런 문제를 보편적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학생회에 우리 문제를 맡기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동아리 중심의 고발문화 확산에 대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대학생들은 제1기 페미니즘 세대(80~90년대)의 자녀 세대”라며 “어렸을 적에는 차별받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이들은 사회에서도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발동아리들이 선정적 폭로만 할뿐 실제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강남역 사건이후 소위 ‘한남패치’(유흥업소 종사ㆍ사생활 문란한 남성 고발), ‘오메가패치’(임신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 얼굴 공개) 등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처럼 폭로에만 치중할 경우 갈등만 부추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창순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여성인권 신장 운동
한 고발 동아리 관계자는 “해당 교수들을 일일이 방문해 묻고 법적책임까지 따지기는 힘든 상황”이라면서도 “어쨌든 학내 분위기를 바꾸는 성과는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규욱 기자 /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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