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6시께 서울시 구로구 대림역 근처를 서행중이던 택시운전사 A씨의 목이 뒤로 꺾였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그대로 A씨의 차를 추돌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은 A씨가 엑셀을 밟아 약 100m를 더 나아간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가해 차량이 사고현장을 떠난 뒤였다.
블랙박스를 들고 구로경찰서를 찾은 A씨는 당황했다. 당직조사관으로부터 '블랙박스 상으론 차량 번호판 식별이 불가능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가도 검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낙담한 A씨는 자진신고대장에 기록만 남기고 귀가할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 경찰서를 찾은 A씨의 아들은 아버지 사건이 접수조차 안돼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경찰은 "피해자가 자진신고대장에 사고 기록을 하길래 수사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접수를 원치 않는 피해자의 사건까지 수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로부터 불과 반나절 만에 가해자를 검거했다. A씨의 아들이 끈질지게 사건 해결을 종용하자 주변 CCTV 분석을 통해 가해 차량 번호판을 금방 찾아낸 것. A씨의 아들은 "임의로 판단해 국과수에서도 못 잡는다더니 해결할 의지가 없었던 것 뿐"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경찰의 수동적인 대처로 뺑소니 사건 해결이 어려워지는 사례는 매년 발생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월엔 '가해자가 술을 마신 것 같다'고 증언한 목격자가 있음에도 가해자 음주측정을 하지 않은 충남지역 파출소 소속 이 모 순경이 시정권고를 받기도
정철우 경찰대 경찰학과 교수는 "교통사고 후 인적, 물적 피해가 생겼을 때 가해자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사고 현장을 떠나면 '뺑소니'로 판단한다"며 "조사관들이 피해 정도를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고 접수를 먼저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나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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