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건물 지하에 ‘야구사관학교’를 차린 것은 1년 반 전인 2012년 여름이었다. 12년 동안 프로 선수생활을 하면서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탈탈 털어 넣었다.
꿈을 갖고 있지만 좌절을 맞본 선수, 막연히 야구선수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어린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함께 가기로 했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그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준다는 의미에서 거창하게 ‘사관학교’란 이름을 붙였다.
단칸방 구할 돈이 없어 창고 한 켠에서 쪽 잠을 자야 하는 불편함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주변의 냉대는 정말 서러웠다고 한다. 특히 야구 선후배들의 “지깟 게 뭘 한다고?”하는 비아냥을 들으면 당장 때려 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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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성은 지난 해 KT 위즈에 2명의 선수를 보냈다. 그리고 2012년엔 SK 와이번즈에 한 명을 입단시켰다. 이들은 프로구단에 지명을 못 받은 건 물론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테스트에서도 떨어졌던 선수들이다. 그야말로 야구선수로서 수명을 다 한 퇴물들이었던 셈이다.
최익성은 이들과 함께 적게는 6개월, 길게는 8개월 동안 같이 뒹굴었다. 그리고 8개월 뒤 그들은 거짓말처럼 프로팀의 부름을 받았다.
최익성은 그 이유를 ‘절박함’에서 찾는다. “찾아오는 선수들의 눈빛만 봐도 진정 절박함이 있는 지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3개월 정도만 훈련하면 짐 싸서 떠나요.”
지금 ‘저니맨야구육성사관학교’엔 5~6명의 중학교 학생들도 훈련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야구유니폼을 입어 본 적이 없는 일반 학생들이다. 그저 야구가 좋아 야구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야구부가 없어서, 혹은 야구부 입회 테스트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꿈 같은 기회다.
최익성 역시 이런 어려움 속에 야구를 시작했다. 최익성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야구 글러브를 끼었다. 그 때만 해도 이런 ‘사관학교’는 언감생심이어서 최익성은 감독 코치 선생님들로부터, 선배 동료들로부터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부족한 기본기를 터득할 곳이 없었다. 눈동냥 귀동냥으로 보고 들은 걸 혼자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익성의 ‘기본기 타령’은 프로에 입단 한 뒤에도 계속됐다. “저 친구 송구 동작이 이상한데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해서 그런가?”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최익성은 이런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밤새워 공을 던졌다.
최익성은 자신이 힘겹게 걸어온 길을 후배들이 그대로 밟는 걸 원치 않는다.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해도 성공할 선수들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인재들을 받아들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지요.”
최익성은 자신의 이름 앞에 훈장처럼 따라다니는 ‘저니맨’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사실 6개 구단을 옮겨 다니는 건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에 살 집을 구해야 하고, 선수들을 사귀어야 하고, 또 그들과 살벌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과정은 하루하루가 생지옥과 같았다.
최익성의 순탄치 않은 선수생활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비옥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최익성이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멘탈’ 바로 ‘마음가짐’이다.
최익성은 자신이 걸어온 가시밭 길 같은 야구인생을 후배들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그 자체가 후배들에겐 큰 가르침이자 교훈이다. “3개월 정도 대화하면 서서히 변하는 모습이 느껴져요. 기술적인 부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최익성은 정신이 바뀌면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야구선수로 실패하면 어때요. 인생에서 실패하면 안되잖아요.”
야구선수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최익성이 인간 최익성으로 성공하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듯이.
[매경닷컴 MK스포츠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