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대미술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마틴(76) 손을 거치면 모든 사물이 단순해진다. 간략한 선과 선명한 원색만으로 특징을 압축한다. 노란색 배경에 하늘색 전구, 분홍색 바탕에 하얀 책, 하늘색 배경에 분홍색 여행 캐리어 등 너무 간단명료해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20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작가는 "세계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들을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린다"며 "그러나 오히려 심플해서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것처럼 사물의 파편을 부각시킨 작품들은 궁금하게 만든다. 아이폰의 한 모서리, 운동화 끈, 선글래스 귀퉁이, 전구의 필라멘트, 캔 뚜껑 만을 그린 작품들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유추해본다. 혹시 퍼즐이나 퀴즈를 설정했냐고 묻자 마틴은 "아니다"고 일축했다.
"여러분들이 즉시 이게 무엇이라고 알아차릴 만한 일상용품만 그린다. 최대한 알기 쉽게 이미지를 구성한다. 적게 표현하는데 관객들은 너무 많은 것을 이해하고 감상하더라. 와인 따개를 보고 햇빛에서 광합성을 즐기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관객의 해석도 있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 작품이 상상력을 유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인식한 2차원 이미지가 3차원적인 상상을 이끄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은 분명 선글래스가 아니다. 면에 색을 입혔을 뿐인데 여러분은 선글래스라는 걸 안다. 망막에 잡힌 정보와 신호를 뇌에 전달하면 기억이나 판단으로 선글래스를 완성한다. 2차원적 그림만으로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은 사물을 상상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아이폰, USB, 노트북, 무선 마우스, 절전 전구, 하이힐 등 현대 소비 문화를 대변한다. 작가는 "대량생산품은 세계 공통어"라고 설명했다. "한국과 유럽, 아프리카에서도 접할 수 있는 일상용품을 주로 다룬다. 비싸든 싸든 평등하게 작품에서 다루려고 한다. 1978년부터 일상용품들을 드로잉(선으로 그리기)하기 시작했다."
선만으로 그리다가 1990년대부터 대담한 색을 입혔다. 설치미술을 하면서 벽면에 원색을 칠했는데 그 결과가 만족스러워 자신감을 얻었다. "그 때부터 과감한 원색을 사용한다. 영상에 더 끌릴 수 밖에 없는 관객을 잠시나마 멈춰세워 회화를 보게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문구점이나 아트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상이다."
전통적인 회화의 언어를 해체해 개념미술을 개척한 그는 영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데미안 허스트, 줄리안 오피, 사라 루카스, 게리 흄,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젊은 예술가'(yBa)들을 양성했다.
"굉장한 수재들이었다. 지금 여러분이 보는 내 작품 색채는 50세에 발견한 나의 언어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색채를 찾아가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 게리 흄, 사라 로카스 등이 서로 경쟁하면서 좋은 작품을 냈다. 유대감도 끈끈했으며 건강한 선순환 작업 환경을 만들었다."
마틴은 더 이상 배울게 없다면 작품을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작품 활동할 때는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다. 76세이지만 지금이 최고
그의 작품은 화사하고 밝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냐고 묻자 "나는 낙천적인 사람"이라며 "내 작품이 쉽고 매력적이며 아름답게 다가가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5년만에 국내에서 여는 두번째 개인전 '올인원'은 11월 5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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