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BOJ)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내걸고 연 80조엔의 대규모 양적완화를 단행한 지 4일로 딱 4년이 된다.
아베노믹스 제1화살이라는 정권 차원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시장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4년 동안 전례없는 통화량을 쏟아부었다.
BOJ에 따르면 1차 양적완화 직전인 2013년 3월말 137조8026억엔(약 1378조원)이었던 일본의 본원통화량은 지난 2월말 현재 441조3720억엔(약 4413조원)으로 무려 303조엔(약 3030조원)이나 불어났다. 4년간 불어난 통화량은 양적완화(QE)의 원조격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단행했던 QE1·QE2를 능가하는 규모다.
BOJ의 4년간에 걸친 무차별 통화량 살포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을까.
구로다 총재가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들면서 공언했던 '2년 내 물가 2% 달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양적완화는 실패'라는 비관론자들의 인색한 평가에 힘이 실린다.
디플레 탈출의 지표인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는 양적완화 초기 엔저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 덕에 반짝했을 뿐 지난해에는 -0.4%로 마이너스에 빠져들었다. 올해 2월 0.2%로 플러스로 전환되긴 했지만 여전히 0%안팎을 오갈 뿐이다. 1·2차 양적완화에 더해 지난해 2월 마이너스 금리(-0.1%)까지 꺼내든 것까지 감안하면 낙담에 가까운 수치다.
0%안팎의 물가는 더딘 소비심리 회복이 가장 큰 이유다. 아베노믹스 4년 동안 임금이 꾸준히 상승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소비보다는 저축을 선택하는 추세는 변하지 않고 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2월말 현재 장롱예금은 무려 43조엔(430조원)에 달해 최근 3년 동안 무려 30%나 급증했다. 통화량 공급과 제로금리에도 돈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글로벌 경제회복 둔화로 원유가격이 급락한 것도 물가 발목을 잡은 이유 중 하나다. 양적완화 초기에 배럴당 100달러를 넘던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은 지난해 한때 20달러대까지 폭락해 일본 수입물가가 크게 떨어졌다.
BOJ도 물가 2% 달성시기를 당초 '2년 내'에서 '2018년도'로 늦추며 디플레 탈출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게다가 BOJ는 물가2% 달성시기를 무려 5번이나 미뤄 신뢰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다. 2018년도에 가능할 지 여부도 가봐야 안다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디플레 탈출이 요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BOJ의 양적완화는 아베노믹스 제1화살로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해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업 투자와 부동산, 취업 등의 경기지표를 보면 잃어버린 20년 동안 지속된 경기위축과 자신감 상실로 인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과거 민주당(현 야당인 민진당) 3년 동안 초엔고로 고전했던 일본 대기업들은 BOJ의 양적완화 이후 엔저를 등에 업고 실적개선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초기 달러당 80엔 안팎이었던 엔화값은 한때 130엔을 넘봤다.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에 따른 안전자산 선호현상에 다소 강세로 전환됐지만 지금도 110엔대로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한 약세기조다. 여기에 BOJ의 제로금리는 기업에 이자부담없는 자금을 공급해줘 공격적인 투자와 인수합병(M&A)를 유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기업의 M&A는 전년도바 30%나 늘어난 무려 10조9127조엔(약 110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1년 초엔고 시절 전략적으로 해외투자를 늘렸던 시절보다 오히려 M&A가 많아졌다. 제로금리 덕에 지난해 회사채 발행액은 18년 만에 최고치인 11조3000억엔에 달했다. 자금조달이 편해지니 지난해 4분기(10~12월) 기업의 설비투자금액도 82조2538억엔(연율)에 달해 1994년 이후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기업 경영활동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국민경제 지표 중 가장 중요한 취업률도 90년대 버블기를 능가하는 수준을 되찾았다. 지난 2월 실업률은 2.8%(총무성 집계)에 불과해 22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대졸 취업률은 97%를 넘어 사실상 완전취업 상태에 진입했다. 질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기업들의 인재쟁탈전은 단순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아닌 기업 경기회복 덕분이라는 평가다.
제로금리 덕분에 주택론 규모는 90년대 버블기 수준까지 높아졌고, 올해 1월 전국 공시지가도 9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섰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할 때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20년 이상 일본 경제를 괴롭혀왔던 디플레 패배심리는 차츰 사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앞으로 BOJ의 양적완화 성패는 살아나는 경기흐름을 얼마나 빨리 소비로 연결시켜 물가 2%를 달성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BOJ에 남은 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본격화되고 있어 미일 금리차가 커질 조짐이고, 일본 국채의 40%를 BOJ가 보유중이라 국채매입을 통한 통화량 공급도 점점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BOJ의 양적완화가 디플레 탈출이 아니라 엔저를 유도하는 외환시장 개입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도
무엇보다 BOJ의 양적완화 성패는 BOJ의 향후 정책보다 아베노믹스 제3화살 성장전략과 구조개혁이 얼마나 성과를 내느냐에 달려있다는 지적이다. 저출산고령화 생산인구감소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조개혁 없이 돈의 힘에만 의존하는 것은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부작용만 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도쿄 = 황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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