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10대 가수 4인방을 기억하는가? 2001년 제2의 보아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획사들은 저마다 10대 여자 솔로 가수들을 내놓았다. 바로 다나, 하늘, 유리, 죠앤이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20~30대 나이의 사람들은 분명 이들의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당시 예쁜 외모와 풋풋한 모습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았던 이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나는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소속가수로 있으며, 죠앤은 지난 2012년 Mnet ‘슈퍼스타K4’에 출연해 팬들에게 반가움을 안기기도 했다. 또 하늘은 2001년 데뷔해 2010년 로티플스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나, 지난해 숨져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유독 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유리였다. 유리는 당시 네 명의 솔로 여가수들 중 가장 많은 나이로 데뷔했다. 물론, 유리의 나이도 결코 데뷔하기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 4살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꿈
피아노학원 강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가수 유리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불과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네 살이 되던 해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한 치의 주저 없이 “가수”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실 전 가수였죠. 아빠가 ‘너는 가수다’라고 항상 말해주셨어요. 전 불과 4살 때 가수가 된 거죠. 단 2명(엄마, 아빠)의 팬으로 시작한…(웃음). 부모님의 영향이 정말 컸어요.”
놀라운 것은 그 어린 시절 꿈이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수에 대한 확고한 고집이 있었고, 학창시절 온갖 대회를 누비며 상을 쓸어 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각종 동요제에서 수상한 것은 물론 간단한 선율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곡을 만들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했다. 특히 중학교 3학년 때는 ‘명탐정 코난’의 OST(작곡 동물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특히 아버지가 팝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때문에 자연스럽게 팝 음악을 접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낀 거죠. 그 중 휘트니휴스턴의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가수의 열망을 더욱 크게 했죠. ‘꿈이 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은 보면 안타까워요. 하고 싶은 게 뚜렷하다는 것은 정말 큰 선물이라는 것을 느껴요.”
자라온 환경이 그녀의 음악인생의 초석이 되었다면, 2000년 ‘천리안 사이버 가요제’는 본격적인 가수 생활의 문을 열어준 계기가 됐다. 그녀는 당시 17살이었고, 직접 만든 곡으로 최연소 대상을 차지했다. 이 가요제는 우승자에게 자작곡으로 꾸려진 앨범과 상금 혜택을 안겨줬다.
◇ 데뷔 전에 팬카페 회원 2000명…그야 말로 황금기
‘천리안 사이버 가요제’를 통해 그녀는 ‘2001 대한민국’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에 피처링 가수로 참여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주석, 바비킴, MC스나이퍼 등 힙합가수들과의 친분을 쌓게 됐고, 힙합가수들이 선정한 피처링 가수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데뷔도 하지 않은 그녀에게 팬카페가 생겼고, 2000명의 회원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후 그녀는 18살의 나이로 1집 앨범을 들고 데뷔했다. 당시 Mnet ‘마마’(현 MKMF)에 하늘, 죠앤, 다나 등과 함께 후보에 오르기도 하고, 토크쇼도 출연했다. 특히 유리는 ‘여자 서태지’ ‘천재소녀’ 등의 수식어로 불렸다. 어린 나이에 전곡을 직접 프로듀싱하고, 라이브 무대를 고집하는 그녀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유리는 패션쇼 메인 모델, VJ는 물론이고 라디오를 동시에 6개를 진행하는가 하면, 데뷔 앨범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수십 군데 가량을 돌았다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는 기획사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아, 데뷔를 했구나’ 정도였죠. 신기하기도 했고, 좋아했던 선배들을 직접 만나니까 설레기도 했어요. 그때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황금기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린 나이에 바쁜 일정을 소화하려니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했다.
“당시 인천에 살았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했거든요. 하루에 행사를 보통 6개 이상을 돌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집에 오면 밤 12시였어요. 그리고 또 새벽 4시에 일어나고요. 기억하세요? 사실 신문에 (노래가 아닌) 여드름 때문에 제 이름이 오른 적도 있어요. (웃음). 지금은 추억이 됐지만, 어린 나이에 겪었던 일들이라 그런지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 시련이 닥쳤다. 함께 하던 소속사가 2004년이 되던 해 재정 문제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함께 소속되어 있던 가수들 역시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 위기를 기회로…열정으로 만들어낸 ‘현재’
그렇게 혼자가 된 그녀는 인생그래프를 통해 그 시기를 가장 낮은 곳에 그려 넣었다. 하지만 이를 발판으로 그래프는 계속해서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2006년 홀로서기에 나선 것이다. 1인 기획사를 차리고 Mnet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Music is My Life)를 통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길거리에서 공연을 펼쳤다. 다소 ‘굴욕’적인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바닥부터 시작해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녀의 실제 인생도 다시 섰다.
직접 발품을 팔며 좋은 곡을 찾으러 다니는가 하면, 그간 모아왔던 적금을 깨고 ‘2008 대한민국’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또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던 전자랜드와 손잡고 정규 2집을 발매하고, 국군 방송의 DJ, 위문열차 MC 등 뭐든 닥치는 대로 뛰었다. 사실 소속사의 관리를 받다가 자신의 힘만으로 무언가를 결심하기엔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바쁘게 움직였다.
“디지털 싱글 앨범을 계속해서 발매했어요. 사실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신기한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과거에 컴필레이션 음반을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 봤잖아요. 그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했던 것들이 연륜으로 쌓인 것 같아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녀는 ‘열정’을 꼽았다. 물질적인 면이 물론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적금을 깨고, 이로 인해 발생한 수입은 모두 기부했다. 좋은 취지에서 만든 앨범인 만큼 ‘2001 대한민국’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여러 아티스트들이 흔쾌히 도움을 줬다.
“혼자가 된 이후 잠도 못자가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제 칭찬을 조금 하자면 추진력이 굉장해요(웃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좀 미지근한데, 한번 확정을 짓고 나면 어떻게든 추진을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2012년에는 바비킴의 추천으로 MBC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관중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을 정도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여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가수 유리로 어필한 셈이다.
당시 그녀는 트레이너 숀리와 함께 특별한 앨범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다이어트 동작에 가수 휘성이 만든 곡을 입혀 즐겁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성음악을 만든 것이다. 이 앨범 덕에 유리는 ‘섹션TV’ ‘세바퀴’ 등 방송에 출연할 기회도 얻었다.
“기쁨을 주고 건강해지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참신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간 ‘힐링 콜라보레이션 앨범’이라는 건 없었잖아요. 유행을 타지 않는 곡인 것 같아요. 벌써 2년 전 일인데 아직도 사람들이 기억을 해주시는 걸 보면요. 그렇죠?(웃음)”
언론 홍보도, 앨범 제작도, 아이디어 회의도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몸이 버티지 못한 유리는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한동안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후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유리는 또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발품을 팔아가며 무던히도 바삐 움직인다. 외국 작곡가들을 통해 좋은 곡을 부탁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현재 콘셉트 회의에 한창인 그녀의 앨범은 올해 여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실 지금도 제 이름을 말하면서도 설명을 해야 알아보세요. 제가 이렇다 할 히트곡도 없잖아요. 이제 제 히트곡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할 거고, 방송도 가리지 않고 하려고요.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많이 찍어서 ‘유리’라는 이름이 정말 친근하게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에요.”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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