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인구 기자]
배우 이기우(35)는 tvN '기억'에서 야구 배트를 휘두르며 뜻 모를 웃음을 짓던 신영진을 연기했다. 한국그룹 계열사 부사장으로 권력을 쥔 그는 안타를 치는 타자처럼 권력을 곳곳에 뿌려댔다. 처음 악역을 맡은 이기우는 '기억'이라는 찬스에 '헛스윙'하고 싶진 않았다.
"'기억'과 신영진에서는 나왔는데, 스태프들과 함께한 좋은 기억에서는 아직 못 나왔어요. 현장앓이 중이죠. 박찬홍 PD님이 첫 만남부터 종영하는 날까지 잘 보듬어주셨어요. 젊은 배우들을 자식처럼 아껴주셔서 신나게 작품을 찍었습니다."
멀끔한 외모의 이기우는 '기억'에서 희망슈퍼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등장했다. 껍질이 서서히 벗겨지듯 진실과 함께 신영진의 악행도 드러냈다. 신영진은 결국 파국을 맞았지만, 이기우에게는 성장의 든든한 발판이 됐다.
"감독님을 본 다음 날 바로 캐스팅이 됐어요. 피규어가 가득 들어찬 신영진의 방 세트장이 완성되기 전까지 제작진과 신영진 캐릭터를 의논했죠. 기존 작품의 악역과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서 세트장 도면을 보고 연구하기도 했어요."
이기우는 촬영 시작 전 박 PD와 그린 신영진의 모습을 따라갔다. 이성민(박태석 역)과 극 초반 대결할 때 신영진이 화내는 장면을 실소로 바꾼 것이 유일한 수정이었다. 매회 화려한 양복을 입거나 쓴웃음을 짓는 것도 신영진을 표현하려는 방법이었다.
"구도상 필요할 수밖에 없는 악역으로 보이긴 싫었죠. 대본을 읽으면서 대사 사이에 필요한 지문을 만들기도 하고, 표정도 과하게 했어요. 상대방에게 목줄을 채우고 졸개로 만들려고 하는 신영진의 미소도 연구했죠."
'기억'은 2,3% 시청률로 작품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냈다. 박 PD의 구도와 영상미를 살리는 연출, 김지우 작가의 탄탄한 이야기의 얼개가 있었지만,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변호사'라는 주제가 다소 무거웠기 때문이다. 16부작으로 막을 내린 것도 중반부부터 치닫던 상황을 담아내기에 무리가 따랐다.
"'기억'은 사실 20부작으로 준비한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16회로 끝나야 하니까 벌려놓은 것을 수습하는 데 급한 감이 있었죠. 다행히 내공이 있는 제작진과 배우 덕분에 4회 분량을 축소한 것치고는 억지스럽거나 어설프게 끝난 건 아닌 듯해요."
이기우는 신영진에 대해 "항상 사건과 연관된 태풍의 핵으로 가지 못했다. 주변에 돌기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그만큼 악역인 신영진을 향한 애착이 남달랐다. 제한된 역할만을 소화하다가 데뷔 13년이 돼서야 원하던 역할과 만나서다.
"악역을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어요. 신영진을 연기한 뒤에는 연기에 대한 갈증과 다른 역할을 향한 호기심, 욕구가 생겼죠. 대다수의 선한 사람 속에서 소수의 악역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악역을 만난 이기우는 비로소 '몸 쓰는 법'을 터득해갔다. 흔한 악역과 다르면서도 표정과 동작을 세심하게 풀어야 했다. 피규어 작품이 전시된 사무실에서 주로 촬영해야 하는 것도 상황보다는 인물이 도드라져야 하는 이유가 됐다. 그는 현장에서는 이성민에게 배우고, 촬영이 없을 때는 선배 배우들의 작품 연기를 참고했다.
"이성민 선배님은 후배들이 잘 알아듣고 할 수 있게 하는 스킬과 배려가 좋으세요. 이준호와 윤소희가 정말 부러웠어요. 이성민 선배님과 항상 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죠. 저는 항상 로봇이나 비서 옆에 있었고요(웃음).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관상' '신세계'의 이정재 선배님이나 박성웅 선배님의 연기를 참고했습니다."
신영진이 야구의 광팬이고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그가 희망슈퍼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복선이었다. 하지만 이기우는 "사실 야구를 안 좋아하고 배트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뒷부분에서 야구하는 장면이 나올까 싶어 스윙 연습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에게 '기억'의 각 장면은 모두 소중한 기회였다.
모델로 데뷔한 이기우는 2003년 영화 '클래식'으로 배우로 발돋움했다. 대학 입학 후 모델 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봤다. "키 큰 놈 하나 필요하다"라는 곽재용 감독의 요구에 딱 맞아떨어진 인물이었다. 연기 경력이 전혀 없던 이기우의 발전하는 모습에 곽 감독의 마음도 열렸다.
"대본을 받고 처음으로 연기 연습을 했죠. 감독님이 오디션 기회를 네 번이나 주셨어요. 조승우 선배님과 키 차이가 클수록 좋다곤 했지만, 제 연기는 형편없었죠. 그래도 감독님이 오디션을 볼 때마다 좋아지는 모습에 '써도 되겠다'고 판단하셨다고 해요. 편집 과정에서 영화의 과거 부분이 부각돼 영화 관계자들의 눈에 띄었죠."
10년 넘게 작품을 통해 팬과 만나는 이기우는 이러한 꾸준함이 오히려 아쉽다고 했다. 한결같이 일했지만,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지 못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기억'은 성장의 계기가 됐다.
"지금처럼 10년 동안 열심히 했다면 지금 결과는 달라졌을 듯해요. 제 노력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성장 기회를 놓친 거죠. '기억'이라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으니 그냥 헛스윙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더 연기에 욕심이 생겼죠. 기분 좋은 봄이에요. 앞으로는 후배들이 벤치마킹하는 인상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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