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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버블시스터즈의 막내로 데뷔한 가수 영지는 팀의 걸출한 실력 덕분에 신인인데도 신인 아닌 것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다 보니 늘 ‘노래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다.
팀 탈퇴 후 솔로로 데뷔한 20대 중반에도 역시나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이 그를 짓눌렀고, 20대 후반엔 박효신, 휘성, 환희, 거미, 린, 이정, 제아, 이영현, 임정희, 케이윌, 김태우 등 걸출한 ‘81년생’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또 다른 부담이 엄습해왔다.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한 30대 초반에도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은 여전했다는 영지.
“데뷔 초부터 가수 활동을 해온 내내 부담이었어요. 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실제 제가 쌓은 무대 경험치나 배워간 것보다 ‘더 잘 하겠지’였죠. 영지 자체가 아닌, ‘前 버블시스터즈’ 혹은 ‘누구의 보컬스승’ 등 수식어가 많았죠. 그 모든 게 부담이 됐어요.”
자칭 ‘소심’, ‘세심’, ‘섬세’, ‘집요’의 아이콘인 영지는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강박의 나날을 보냈다. 한 땐 지독한 우울증에 가까운 지인을 제외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조차 꺼려했었다고.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더라고요. 20대 땐 아무 것도 안 하고 내내 꿈만 꿨죠. 좋은 가수, 좋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에 대한 꿈을 꿨고. 그런데 꿈이 너무 장황하고 크다 보니 섣불리 못 움직이겠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아이 같은 마음인 건, 누가 (저를) 데리고 가주는 건 줄 알았어요. 그저 당연히 ‘네가 탐이 난다’며 데리고 가는 건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죠. 지나고 보니 자신감은 없는데 자존심이 셌던 것 같아요.”
뒤늦게 온 기나긴 질풍노도 이후, 30대에 접어든 영지는 문득 현실을 직시하고 서서히 닫혀진(혹은 닫아뒀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30대가 되니 미래에 대한 생계적인 걱정이 됐죠. 이대로 가다 보면 가족도, 친구도, 나도 못 지킬 거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강의 제의를 받고 직장생활을 하게 됐죠. 벌이가 생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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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큐브 1호 가수거든요. 큐브 사무실 근처에 작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소문을 듣고 연예 관계자분들, 셀럽, 후배 등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영지라는 사람이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스멀스멀 떠오른거죠. 그분들로부터 ‘왜 노래 안 하냐’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가 구체적인 제안을 받고 다시 가수 영지로 나오게 됐어요. ‘너 왜 안 해?’라는 반응 자체가 감사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아이러니는 ‘사회인’ 영지의 출발점이자 본업인 가수만 빼곤, 모든 일이 다 잘 풀렸다는 것이다.
“가게를 두 개 더 하게 되면서 업장이 세 개로 늘어났어요. 학교도 심지어 잘 됐죠. 1년 만에 겸임교수가 되고, 이후 한양대학교로 스카우트 돼 자리 잡고. 인간관계, 사회관계, 장사 다 잘 되는데 정작 제가 하고 싶었던 노래만은 잘 안 된 거에요.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더군요.”
그의 삶을 옭아맨 부담과 풀지 못한 숙제를 단번에 해결해 준 무대는 바로 MBC ‘일밤-복면가왕’이었다. 지난 5월 ‘복면가왕’에서 백세인생으로 3라운드까지 진출한 영지는 모처럼 선 무대에서 가요계 그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냈다.
“제작진 연락을 받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 했어요. 가면으로 저의 이름을 숨기고 오른 ‘복면가왕’ 무대는 그런 게(대중의 고정된 시선과 그에 따른 부담) 없어서 정말 편했어요.”
영지는 ‘복면가왕’을 계기로 눈을 새로 떴다고 했다. “그날 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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