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57년. 도대체 (연기를) 얼마나 사랑했길래 이렇게나 오래, 쉬지 않고 한 길만 걸어왔냐고? 물론 수차례 포기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지.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짐하고 이겨내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네요. 무대와 스크린에서 마음껏 연기하는 지금… 이렇게 행복한 걸 보니, 배우하길 참 잘한 것 같소! 허허”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공연에서 단역, 조연 주연을 망라해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만 300여 편에 달한다. 데뷔 초엔 이국적인 비주얼 때문에 노름꾼 아니면 난봉꾼 역할을 주로 해오다, (연극)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후에야 제대로 된 배역을 맡기 시작했단다. 50년간 쉬지 않고 연기의 길을 걸어온 그가 42년 만에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57년차 대배우 박근형(77)의 이야기다.
23일 오후 서울 종로 프레이저 스위트 호텔에서 영화 ‘그랜드 파더’로 전율 돋는 연기를 선보인 박근형을 만났다.
그는 극중 젊은 시절, 베트남 참전 용사로 활약했지만 영광을 뒤로 한 채 아픈 가억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노인 역을 맡았다. 가족과의 연을 끊은 채 살아가던 노인은 ‘아들의 자살’ 소식에 하나 뿐인 핏줄인 손녀와 만나게 되고, 아들의 죽음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다.
박근형은 “워낙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찍은 영화라 어떻게 만들어졌을 지 많이 궁금했다”며 “작품을 보고 완성도에 한 번 놀랐고, 감독의 능력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남우주연상이라니! 실감이 안 났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이가 들면 점점 쓰임새가 없어지기 마련이잖아. 이 나이에 느와르 단독 주연이라니! 우리 시대만 해도 이런 명쾌한 메시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작품을 만나기가 참 힘들었는데... 흔한 조폭, 화려한 액션이나 짙은 오락성 없이 분명한 주제의식을 담은 영화를 만나 행운이라고 생각하오.”
앞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나이답지 않은 외모와 패션 감각으로 ‘로맨티스트’ ‘꽃할배’ ‘원조 꽃미남’ 등의 수식어를 얻으며 중후한 멋스러움을 내세웠던 그가 이번엔 망치와 총을 든 채 광기어린 사투를 벌이는 무시 무시한 ‘그랜드 파더’로 파격 변신을 했다.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 드릴 것 같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느끼든 내게는 흥분되고 설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느와르이긴 하지만 내 나이에 액션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라며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따라 작품 전체를 감상하다보면 묵직한 여운과 분노, 깊은 여운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뭐니 뭐니해도 우리 안사람이 가장 기뻐하지 않겠소?”라며 허허 웃었다.
“내 액션에 큰 기대를 갖고 영화를 본다면 실망하겠지만, 감독이 날카로운 눈과 스킬로 이 둔탁한 액션을 극적으로 잘 이끌어줬기 때문에 (관객들이)신선하게 봐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총을 쏘면 상대방이 피 흘리며 죽고 마는데 망치나 흉기로 내려치는 건 고통이 증폭되고 긴장감과 두려움이 오래도록 지속되잖아요? 촬영 당시 몇 번이나 순화하자고 얘기 했던 잔혹한 장면들이 적절한 수위로 잘 표현된 것 같소. 아마도 가족들이 가장 큰 응원을 보내주지 않을까? 고생하면서 찍은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우리 안사람은 정말이지 좋아하겠지. 보나마나! 하하!”
박근형은 이번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버스운전 면허 취득은 물론 살을 찌우고 액션 스쿨까지 다녔다. 대역 없이 모든 액션을 100% 소화하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그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공을 들인 작품”이라며 “캐릭터가 처한 상황, 그리고 배경 때문인지 매순간 먹먹하고 가슴이 아팠다. 나 같은 고물차를 폐차하는 신을 찍을 땐 정말 씁쓸했다”고 털어놓았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오래되면 쓰임이 없어지고 결국 사라지잖소? 그게 자연의 이치니까. 끝을 향해 달려가는 노인의 처절한 몸부림, 하나 남은 피붙이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뜯기고 상처받는 현실,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된 불편한 진실 등 이 작품에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가 공감할 만한 각각의 요소들이 모두 담겨져 있소. 아주 명확하게. 그래서 더 애정이 깊었고, 끝난 이후에도 여운이 남네.”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컸던 만큼 후배 배우를 향한 극찬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요즘 젊은 배우들에게선 전도연 이후 큰 감동을 받거나 인상적인 경험이 드물었는데 고보결에게서 그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고보결과)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그저 어린 친구가 참 열심히 한다는 인상만 받았는데 스크린으로 보니 정말 맑은 눈을 가졌더군요. 자신이 표현해야 할 감정들을 섬세하면서도 적절한 수위로 아주 잘 표현해줬고,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면이 훌륭한 친구요. 과거에 (전도연은) 작은 체구지만 집념이 무섭울 정도로 강했고 될 때까지 울면서 달려드는 근성이 남다른 후배였소. 잘 될 줄 알았지 하하! 보결이가 지금 이 가능성을 토대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좀 더 공부하고 실력을 키운다면 분명 전도연 만큼 큰 여배우가 될 수 있을 거요.”
후배에 대한 이야기에 신이 난 그는 애정 어린 조언을 덧붙였다. 자신이 타고난, 혹은 가지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끝없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확장시켜 나가라고. 그러면서 “요즘 (젊은)배우들을 보면 끼와 개성은 넘치지만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달려드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이미 갖춘 것을 바탕으로 좋은 출발을 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더 철저한 준비를 해 한 발자욱씩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당장의 스포트라이트에 빠져 있느라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친구들이 좀 많은 것 같소. 배우는 잘 하는 것과 못 하는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이 와도 빠져들 수 있도록 항상 준비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위한 기초 공부와 간접 경험, 다양한 체험과 지식, 갖가지 상상 등 밑거름이 될 것들을 항상 해야 하죠. 공부를 안 하면서 주어진 재능에만 집착하면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거죠. 끊임없이 나아가고 넘어지고 꿈을 꾸고…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
“당연히 있소. 꿈을 잃으면 죽은 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동안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해왔다면 이젠 이것을 남을 위해 쓰고 싶어요. 그것도 내 고향, 내 이웃들과. 내 고향, 그 시골에서 꿈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배우고 경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소. 학원이나 아카데미 같은 상업적인 기관이 아니라 서당이나 마을 회관 같은 소박한 공간에서 정서적인, 문화적인 부흥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소. 나의 고향에 가 이웃들에게 좋은 작품들을 전하고 소개하고, 먹고 사느라 꿈을 접은 기성 세대들과 아직 어리지만 도시가 아니라 막막한 어린 아이들,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 등등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인 것들을 공유하고 알리는 게 내 꿈이요.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없지만 문화적인 간격을 좁히는 무언가를 꼭 해 볼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예술가에게 은퇴란 없다”면서 “배우로서 계속 연기하고 나아갈 테지만 언젠가 쓰임새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그때까지 나 역시 계속 도전하고, 새로운 문화를 습득하면서 계속 연기에 대한 공부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청년 같은 열정을 불태웠다.
한편, 영화 ‘그랜드파더’는 베트남참전용사로 활약했지만, 가족과 인연을 끊은 채 아픈 기억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노장(박근형)의 일상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들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
하나 뿐인 피붙이를 지키기 위한 힘없는 노인의 목숨을 건 응징. 영화는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관객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8월 31일 개봉.
사진 강영국 기자/ kiki2022@mk.co.kr[ⓒ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