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면에서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승부 중 하나가 바로 한일전이다.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논쟁의 여지없이 씁쓸하게 패배를 인정해야 할 때도 있다. 얼마 전 이요원의 스크린 복귀 작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흥행 참패를 맛본 ‘그래, 가족’과 오는 20일 개봉을 앞둔 일본 영화 ‘아빠의 이토씨’의 경우가 그렇다.
최근 한국에서도 친숙한 일본의 스타 여배우 우에노 주리 주연의 ‘아버지와 이토씨’가 언론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가족극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웃음과 재미, 여운와 감동을 두루 갖춘, 리얼리티까지 상당해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가족 영화다. ‘애니메이션만 고 퀄리티일 것’이라는 일본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는 반가운 작품이다.
그 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만 나면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는 못 말리는 아버지. 변변한 직업도 없고 나이까지 많은 딸의 애인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아버지는 경직된 표정과 무뚝뚝한 말들로 시종일관 집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지만 이토 씨는 아버지를 위한 의자를 사고 그의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며 마냥 즐거워한다.
영화는 각종 현실적인 이유들로 점차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현실을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심각한 취업난에 30대 중반이 되도록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여주인공, 가장‧장남의 책임감과 빡빡한 현실 속에서 쫓기는 듯 살아가는 그녀의 오빠, 40년 넘게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니 자식들은 그저 자신을 짐으로 여기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을 위해 다시금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외로운 아버지, 따뜻한 심성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실패하고 새로운 사랑을 조심스럽게 시작 중인 돌싱남까지.
모든 캐릭터들은 저마다 현대인의 어떤 상징적인 갖고 있지만 과장되거나 억지스러운 부분이란 없다. 분명하게 정의 내려진 답도 없다. 코믹 극을 표방하지만 그 웃음은 박장대소가 아닌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긴다. 캐릭터의 희화화가 아닌 상황이 주는 자연스러움이 녹아 있고 무엇보다 모든 대사, 메시지, 배경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어 진정성이 느껴진다.
무능한 아버지는 겁도 없이 사채를 써 빚만 떠안긴 채 떠났고 아픈 어머니는 천사 같은 심성을 지녔지만 강인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래서 자녀들의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만드는 떼어낼 수 없는 혹 같은 존재다.
운동선수 출신인 장남(정만식)은 툭하면 주먹을 휘둘러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방송국 기자인 둘째(이요원)는 겉으로는 까칠해 보이지만 홀로 가족의 뒷바라지를 다 한다. 얼굴만 반반한 셋째(이솜)는 변변한 직장 없이 언니에게 늘 카드 값을 막아 달라고 성화지만 어딘가 사랑스럽고 자유로움이 가득한 영혼이다. 전형적인 웬수 같은 가족의 성장기를 담았다.
가족의 해체 위기에 놓인 이들의 앞에 ‘아버지와 이토씨’에서는 이토 씨가, ‘그래, 가족’에서는 숨겨진 핏줄 막둥이 오낙(정준원)이 있다.
과거를 알 수 없는 54세 아저씨이자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인 이토 씨는 따뜻하고 온화한 성격에 매사에 침착한 인물이다. 유연한 친화력에 예의도 바르고 이해심도 넘은 그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들 가족의 중심에서 화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이들이 보다 솔직하게 소통하고 진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때론 따뜻하게, 때론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자연스러운 이음새가 되어준다.
반면 오낙은 등장 자체만으로도 어떻게 이 가족이 화해할 지를 시사한다. 가족이자 순수하고 맑은 11살의 막둥이. 가족들은 그에게 툭하면 고아원에 보내겠다는 협박만 늘어놓으며 상처를 주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정 때문에 함께 화합하며 다시금 가족임을 깨닫는다.
영화 속 모든 코드는 뻔하다. 가족이라는 관계 아래 각기 다른 개성의 인물들이 모여 수차례 갈등을 겪지만 결국엔 힘을 합쳐 역경을 이겨내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이야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뚜렷하지만 확장성이 없고, 어떤 고민을 시사하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 순간에 극적인 결말로 매듭짓는다. 단순한 웃음과 찰나의 유쾌함은 있지만 여운이나 울림은 없다.
가족극이 단지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는 뻔한 장르 이상의 힘을 발휘하려면 무엇을 더 채우고 집중해야 하는지, 두 영화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가족의 해체가 일반화된, 피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이토 씨’가 시사하는 바는 꽤 깊다. 우리가 기쁘게 패배를 인정하고 본받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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