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오늘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한일정보보호협정의 절차상 잘못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충분한 여론수렴 없이 '즉석 안건'으로 국무회의에서 처리할 사항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 대통령은 이어 국회와 국민에게 협정 내용을 소상하게 공개하고 설명해 오해가 없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얘기만 놓고 보면 이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 한일정보보호협정 처리를 사전에 보고받지 못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전에 알았다면 이렇게 몰래 국무회의에서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라는 뜻일까요?
실제로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일정보보호협정이 즉석 안건으로 올라간 데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것으로 안다며, 협정이 통과될지도 보고를 못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럼 뭘까요?
외교부와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제대로 사전 보고도 하지 않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에 은근슬쩍 처리했다는 걸까요?
외교부는 한일정보보호협정이 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할 필요가 없는 사안으로 판단한 걸까요?
아니면 청와대의 누군가가 외교부 탓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걸까요?
어제 외교부 관계자는 기자들과 오찬자리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그동안 '국무회의 비공개 처리방식이 잘못됐다는 점을 여러 번 청와대에 지적했다'며 '의결 당시 언론에 알리지 않은 것은 청와대의 의중이었다'고 폭로했습니다.
외교부는 일본 관련 독도와 교사서 등의 문제를 늘 다뤄왔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며, 협정 체결이 알려졌을 때어떤 역풍이 불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의견이었다는 겁니다.
이 당국자의 말이 맞는다면, 청와대가 외교부의 얘기를 뭉갰다는 얘기입니다.
이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에 국내에 남아 있던 청와대 관계자는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입니다.
청와대가 시켜서 한 일이라는 외교부 주장에 청와대는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큰 방향만 잡았지, 실무 차원에서는 외교부가 처리했다는 겁니다.
또 국회 협의와 국무회의 안건 상정도 외교부가 할 일이기 때문에 청와대는 관련이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아울러 금요일 일본 각의에서 통과가 예정돼 있었기에 우리도 비밀로 한 것이라는 황당한 해명만 내놓았습니다.
청와대 주장이 맞는다면, 외교부는 한일 문제에 아주 안이한 시각을 갖고 있거나 또는 대통령과 청와대를 아주 우습게 본 셈입니다.
이와 달리 외교부 주장이 맞았다면, 청와대는 일제 식민지 역사와 독도문제를 아주 가볍게 보거나 국민을 아주 우습게 본 셈입니다.
총리실도 외교부와 국방부가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며 억울하다는 반응입니다.
어느 쪽 말이 맞든 국민은 서로 네 탓 공방만 하며 면피하기에 급급한 정부와 청와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한심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대선을 앞둔 터라 여야 정치권도 정부와 청와대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민주통합당은 이 사안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함께 협정 폐기를 주장했습니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이해찬 / 민주통합당 대표
- "너무 하자가 많다. 국무총리를 대통령이 해임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에서 불신임 동의안을 낼 수밖에 없다. 이 사안은 해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협정을 폐기 해야 한다. 역사 역행하는 것을 민주당이 받아 들일 수 없다. 국회에서 엄정하게 따지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민주통합당은 이 문제를 박근혜 새누리당 전 위원장까지 연계시키는 분위기입니다.
추미애 최고 위원은 '박근혜 정부'가 된다면 한일 협력 메커니즘이 강화될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 한 뿌리를 같이하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한길 최고위원도 일본군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독재 정치로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박근혜 전 위원장이 반성이나 사과가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새누리당 역시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따갑습니다.
황우여 대표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황우여 / 새누리당 대표
- "이번 한일정보협정은 영토분쟁을 도모하는 국가와 군사협정이라는 점에서 국민적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민의와 국민정서를 고려해 민의의 전당인 국회와 논의해 신중히 처리했어야 하는 사안이라 생각한다. 이제 국회가 엄중하게 이익을 따지고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
남경필 의원 역시 청와대가 꼼수를 부리다 된통 걸렸다며 1차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우택 최고 위원은 '정부가 왜 이 협정을 체결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영토 도발을 일삼는 일본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데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새누리당이 한일 정보보호협정의 추진 사실이 알려졌을 당시 협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변인 논평을 낸 것과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일각에서는 박 전 위원장의 '박 심'이 작용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어설프게 정부나 청와대 편을 들었다가는 연말 대선에서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린 걸까요?
어쨌든 청와대는 국회 보고를 거쳐 협정 서명을 다시 추진한다는 방침입니다.
문책할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민심은 싸늘해졌습니다.
그래서 현 정부 임기 내에서 처리가 어렵다는 말도 들립니다.
국익도 큰 손실을 봤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서둘러 처리했다는 말이 나온 터라 협정 체결이 연기되면서 대미 관계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협정 체결에 반발하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 관계도 더 복잡해졌습니다.
한일 관계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한번 잘못 꼬인 매듭을 풀기가 쉽지 않고, 잘못된 단추를 다시 끼우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추어 정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닐까요?
5년 전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만든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에게 한 말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걸까요?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 김형오 / hokim@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