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명의 국내 플라스틱 가공·공정 분야 전문가들과 24개 기업이 참여하는 고분자나노융합소재가공기술센터(CNSPPT)가 세계 4위의 한국 플라스틱 산업이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는 위기감을 담은 백서를 내놔 관심이 집중된다. 국내 중요 소재산업 중 하나인 플라스틱 산업 규모와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도 한국만 전례 없는 위기에 내던져져 있다고 집필진은 통탄한다. 이번 백서는 안경현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등 학자들로 구성된 CNSPPT 운영위원 6명이 함께 집필했다.
5일 매일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플라스틱 가공산업 백서: 플라스틱 산업의 생존과 재도약을 위해'는 과거 하드웨어 위주로 선진국을 추격할 때와 달리 글로벌 경쟁단계에서 필요한 가공기술에서 뒤쳐지고 인력배출이 끊긴 국내 플라스틱 산업의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제품을 만드는 일은 소재를 가공하는 일인데, 한국은 소재에만 관심을 갖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에 대한 투자를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소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엘지화학, 롯데케미컬 등 대기업 위주인 반면, 가공산업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 틀과 부품을 만드는 등 중소기업 위주다. 집필진은 "제조업은 소재와 가공이라는 두개의 바퀴를 갖고 굴러가야 하는데 하나의 바퀴(소재)는 그나마 굴러가지만 다른 하나(가공)는 너무 작고 제대로 돌지 않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선택은 바퀴를 제대로 갖추던지 아니면 게임을 그만두던지 두가지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백서발간을 주도한 안경현 CNSPPT 센터장은 "예전엔 가공분야에도 좋은 인력 유입됐지만 지금은 다들 나노·바이오로 빠졌다"며 "교수들도 생존을 위해 나노·바이오 연구에 집중하다보니 가공분야 전문가가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대학 실험실에서부터 연구가 없다보니 석·박사 배출이 안 되고, 이는 다시 산업계에 전문 인력 공급이 끊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세계 4위(생산량 기준) 수준의 한국 플라스틱 가공 산업은 자동차, 전자,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며 국내 경제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약 25만명이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들 대다수는 부품소재와 관련한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독일을 추격하는데 실패하고 중국이 턱밑까지 쫓아오면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중국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다. 안 센터장은 "중국은 거의 다 쫓아왔고 많은 부분에선 이미 한국을 앞서기 시작했다"며 "단적인 예로 중국의 켐차이나가 지난해 독일의 세계적인 화학공정설비회사 크라우스마파이를 인수한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환골탈태' 수준으로 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게 백서의 지적이다. 플라스틱 산업은 한국이 나름대로 좋은 기반을 갖추고 있고 미래 성장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적인 경쟁을 해볼 만한 산업이기 때문에 포기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집필진은 "원료를 수입해 단순히 가공하는 '양적 성장' 단계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의 '질적 성장'을 추구해야 '생존' 할 수 있다"며 가공 기술을 중심으로 산업의 체질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기업은 무형 자산인 기술에 대한 관점을 재정립하고 △대학은 실제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과 인재 배출을 담당하며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라도 기업과 대학, 정부가 협력하는 연구 생태계를 조성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
산업통산자원부가 지난 2012년 서울대에 설립한 고분자나노융합소재가공기술센터는 산업체 기술 지원, 전문인력양성, 해외 최신기술동향 소개 등의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기업 기술지원으로는 190억원 이상의 매출 증대 및 생산성 향상 효과 실적을 거뒀다.
[황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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