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표권향 기자] 2013년 5월 4일 잠실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전. 어린이날 더비로 만원관중이 들어찬 라이벌전 선발 마운드에 유희관(27)이 올랐다. 평범한 체격에 구위도 그저 그런 왼손투수였다. 관중들은 이 낯선 투수에 믿음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닝이 이어질수록 이 친구의 숨겨진 매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희관은 관중들의 폭발적인 환호성을 들으며 잠실벌에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프로데뷔 5년 만에 오른 첫 선발 마운드와 첫 선발승. 유희관은 올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41경기에 등판해 10승7패3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3.53을 기록했다. 이는 1988년 윤석환(당시 OB 베어스) 이후 25년 만에 왼손투수로서 10승을 달성한 역사적 기록이다.
유희관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치솟았다. 연봉에서부터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올 시즌 연봉 2600만원이었던 유희관은 285%(7400만원)가 인상된 1억원에 2014년 연봉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단점이었던 느린 직구를 장점으로 만든 유희관. 화제의 ‘느림의 미학’을 탄생시킨 유희관이 걸어온 야구인생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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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관은 야구부에 가입하기 위해 남성초등학교에서 방배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사진=한희재 기자 |
▲ 야구가 좋아 울고불고
초등학생 유희관이 가장 즐겨했던 놀이는 야구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과 후 넓은 공터를 이용해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하지만 당시 유희관이 재학 중이던 남성초등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다.
야구선수의 꿈보다는 ‘야구광’이었던 유희관의 인생에 야구가 속하게 된 건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하루는 전학 간 친구가 야구부 모집 전단지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워낙 야구를 좋아했던 나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 부모님께 야구부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집안에 야구했던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평범하게 공부해서 직장에 취직하길 바라셨기에 반대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야구부가 되겠다는 유희관의 마음은 확고했다. 유희관은 “공부를 병행하면서 야구를 하겠다며 울고 불며 졸랐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야구를 하겠다는 마음을 크게 보셨는지 결국 허락해주셨다”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야구를 위해 유희관은 5학년을 마치고 남성초등학교에서 방배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보통 초등학교 2~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는 동료들에 비해 늦은 시기에 야구계에 입문했다. “원래 야구를 해서 기본 실력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다만 키가 작아 힘이 부족했다. 당시 내 키는 출석부 2~3번이었다”라고 했다. 때문에 유희관은 남들이 하는 두 배 이상의 노력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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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관은 느린 공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두 배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한희재 기자 |
▲ ‘왼손 에이스’의 고민
고등학생 때 또 한 번 학교를 옮겼다. 이유는 단 하나, 중학교 때 감독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유희관은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이수)중학교 때 감독님이 장충고 감독님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독님이 좋았기에 바로 배재고에서 장충고로 전학했다”라고 설명했다.
유희관이 전학을 결정할 정도로 유영준 감독(현, NC 다이노스 스카우트 팀장)의 영향력은 컸다. 중견수였던 유희관을 투수로 성장도록 기틀을 마련해준 것도 바로 유 감독이었다.
“감독님은 키 작은 나를 배려해주셨다. 내가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또 매일 키 크라며 철봉에 매달려 버티는 훈련을 시켰다”라고 전했다.
유 감독의 지도하에 유희관은 고등학생 때부터 투수를 전문으로 삼았다. 유희관의 경기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직구 구속이 낮다는 것이 흠으로 잡혔다. 결국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중앙대로 진학했다.
“왜 난 볼이 느릴까”라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희관의 야구인생은 대학교 때부터 꽃을 피웠다. 4년 동안 통산 18승을 달성하며 13번의 완투 경기를 펼쳤다. 대학리그의 ‘왼손 에이스’로 불리며 야구 월드컵 등 대학교 2학년 때만 두 번 대표팀으로 선출돼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너무도 싸늘했다. 대학리그 우승을 이끌어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던 유희관은 2009년 2차 드래프트 6라운드 전체 42순위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지명 순위보다 낮았기에 실망감이 컸다.
유희관은 “대학리그에서는 왼손투수 중 랭킹에 들었지만, 프로팀 관계자들은 내 공이 대학에서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편견을 깨기 위해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며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다”라고 입단 초 답답했던 속내를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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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관은 김현수, 이원석, 임태훈 등과 훈훈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유희관 제공 |
▲ 함께 하기에 더 빛나는 우정
중앙대 야구부 시절 유희관은 훈련 중 잠시 쉬는 시간이 있으면 곧장 농구장으로 달려갔다. 야구장만큼이나 농구장에서 살았다는 유희관은 “워낙 농구를 좋아했다. 현재 프로 농구선수인 강병현(전주 KCC) 함지훈(울산 모비스) 김선형(서울 SK) 오세근(안양 KGC) 등과 슛팅 대결을 펼쳤다. 내기 3점슛 대결에서는 거의 내가 이겼다”라며 겨울에 자주 농구장을 찾는 이유를 말했다.
유희관은 “야구와 농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투수는 무실점으로 막고, 농구는 슛을 성공시켜 득점을 내 이길 수 있지만, 혼자만 잘해서는 이길 수 없다. 개인의 역할과 팀워크가 조화를 이뤄야하는 중요한 단체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현역 프로야구선수 중 유희관의 동창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대신 프로 데뷔 이후 김현수 이원석 임태훈(이상 두산) 등과 4총사를 이뤄 매일 붙어 다닌다. 입단 동기는 아니지만, 이들의 우정은 그 이상으로 두텁다.
“(임)태훈이는 중학교 후배다. (이)원석이는 내가 입단했을 때 (홍)성흔이형 보상선수로 롯데에서 이적해왔다. 또 원석이가 (김)현수와 친해서 4명이 뭉치게 됐다. 매일 같이 훈련을 하고 밥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라며 거의 하루를 이 3명과 함께 보낸다고 했다.
이들의 첫 여행은 2010년 유희관이 국군체육부대 상무로 입대하기 전 서해로 떠난 송별여행이었다. 유희관은 “모두 낚시가 하고 싶어 바다로 갔다. 그런데 다들 배 멀미로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월척을 바라는 부푼 마음으로 갔는데 파도가 많이 쳤다. 물고기도 잘 안 잡혔는데 우리 중 유일하게 나 혼자 손바닥만 한 물고기를 잡아 ‘강태공’이라고 자랑했었다. 이후 4명 다 배 멀미로 잠자는 칸에서 잠만 자다, 라면 끓여주면 라면을 먹고 또 자고 회무침 해주면 먹고 또 자고를 반복했다. 낚시는 고사하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배 멀미한 기억이 다인 것 같다”라며 껄껄 웃었다.
이들의 우정은 후배들에게도 이어졌다. 지난 8일 유희관은 김현수 이원석 임태훈과 함께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를 찾아 재능기부 및 야구용품 등을 전달했다. “2009년부터 매년 (김)현수가 활동해왔다. 현수가 우리에게 ‘올해는 그들과 같이 야구를 하자’라고 제안해 동참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유희관은 “우리는 특별한 기억보다는 그저 항상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 같이 있을 때 마냥 좋고 재밌다”라며 이들만의 단단한 우정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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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관은 올해 윤석환 이후 25년 만에 왼손투수로서 10승을 달성했다. 사진=한희재 기자 |
▲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2013시즌'
처음부터 유희관의 ‘느림의 미학’이 통한 것은 아니었다. 입단한 해 스프링캠프에서 호평을 받았던 유희관은 2009년 5월 3일 부산 사직 롯데전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유희관은 그날을 가장 후회되는 경기로 꼽았다.
“부산하면 최고의 관중과 응원문화를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은 주말 낮 경기에 공중파 중계가 있었다. 신인이 한 달 만에 1군에 올라온 것이라 기대도 높았다”라고 당시 들떠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유희관은 “이천 야구장에서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해 대전까지 고속버스를 탔다. 다시 대전에서 부산까지 입석으로 기차를 타고 달려 사직까지 갔다. 그러나 하루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왔다”라며 “타자와 싸우기보다 스스로 무너진 경기였다. 화려하면서도 한 순간에 망가진 첫 경기였다”라며 한숨 쉬었다.
유희관은 “야구하면서 떤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해온 게 야구다. 내 공을 던져서 맞고 내려왔다면 후회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스스로 무너지니 후회가 많이 남았다. 야구를 헛되게 했나란 생각도 들었다. 바보 같았다”라며 속상해했다.
그날 이후 유희관은 독한 마음으로 자신과 싸웠다. 최대의 적은 상대 타자가 아니었다. 바로 움츠러 들어있던 자신감을 회생시켜야 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며 제구력 향상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올해 5월 4일 유희관은 더스틴 니퍼트을 대신해 선발 마운드에 올랐다. 직구 135km가 최고구속이었던 유희관은 5⅔이닝 동안 5피안타 2볼넷 무실점으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승리의 주역이 됐다.
야구를 하면서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유희관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 없는 투수의 첫 선발승이었기에 파급효과가 두 배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최고의 한 해라고 기억될 것 같다”라며 웃었다.
만년 유망주란 꼬리표도 뗐다. 2군에서는 잘 하는데 1군에서는 안 통한다는 이미지도 벗었다.
유희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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