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도시바에서 일하는 익명의 과장이 주간지 닛케이BP 취재진에 10시간짜리 녹음 기록을 건넸다. 이 녹음파일에는 도시바가 ‘챌린지’라는 명목으로 상사가 부하직원들에게 ‘불가능한 수치목표’를 주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달성하도록 압박하는 사내 회의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당시는 도시바의 회계 부정이 만천하에 드러나 충격을 불러있으키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사내에서는 회계부정 원인이 된 무리한 목표 설정과 상명하복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사내 회의에서 ‘파와하라’(상사가 부하를 괴롭히는 것을 의미)가 비일비재했다. “회의가 월 1회에서, 주 1회로, 요즘엔 매일 열리고 있다. 하루 만에 진척이 있을 리 없다. 압박하려는 의도다. 비용 계상을 미뤄 달성한 것처럼 위장할 수밖에 없다.” “회계만 속인 게 아니다. 불적합한기술 데이터는 묵살됐고, 상부에 보고되지 않았다.” 닛케이BP는 도시바의 챌린지가 과거에는 ‘가능하면 열심히 하자’는 것이었지만 2008년~2009년부터 ‘목표달성’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파와하라는 일상이 됐다. 이때부터 도시바의 비극은 시작됐다. 회계든, 기술이든 모든 숫자는 조작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들통난 도시바 회계조작은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일본 기업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올림푸스 회계조작과 다카타 에어백 리콜 사태에 이어 도시바가 일본 재계에 충격을 던진 데 이어 급기야 이번엔 일본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미쓰비시그룹의 미쓰비시자동차 연비조작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한 기업의 병폐로 치부하기엔 유사한 사건들이 너무 자주, 너무 여러 곳에서 곪아터지면서 일본 재계에도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 20일 연비조작을 실토하는 기자회견에서 아이카와 데츠로 사장은 “담당부장이 (조작)지시를 했다고 털어놨다”며 경영진의 조직적인 관여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담당 부장이 왜 연비를 5~10% 좋게 보이려고 조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자동차업계 전문가는 “미쓰비시는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높은 연비를 내는 것이 지상과제였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에코차 감세 등으로 신차 판매의 40%를 경차가 차지하고 있다. 경차의 유일무이한 경쟁력은 ‘연비’다. 경쟁사인 스즈키와 하이다츠에 뒤지고 있는 미쓰비시는 연비를 더 높여야 한다는 중압감이 높았다. 업계에서는 “경영진의 과도한 목표를 단기에 달성하기 어려우니 아예 숫자를 조작한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과도한 목표치 설정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 기업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라는 지적이다. 일본 재계 관계자는 “과도한 목표 설정과 이로 인한 심적 압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나라, 어느 기업에나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이보다는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커뮤니케이션까지 막는 상명하복 조직문화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무라이’ 조직문화가 뿌리깊은 일본은 여전히 상사가 명령을 내리면 웬만하면 군말없이 따르는 조직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닛케이BP가 비즈니스맨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명령을 받았더라도 절반이 “지시를 따른다”고 답했을 정도다.
상명하복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다. 커뮤니케이션이 막히면 현장 실무자들 의견은 무시되고, 임계치를 넘는 불가능한 목표치가 설정되기 십상이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순간 ‘무능력자’로 찍힌다. 도시바의 경우 말도 안되는 실적을 요구하며 하급간부들을 쪼면서도 사석에서는 “나도 힘들다”고 토로하는 상급 간부들이 적지 않다. 담당 직원이 “불가능한 목표”라고 얘기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고 회계나 연비를 ‘조작’해야겠다고 결심할 만큼 조직문화가 경직돼 있다는 의미다.
명령과 지시만 있는 상명하복 문화에서는 경영에 전권을 가진 대표이사 사장과 경영진이 부정한 일을 공모해도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다. 도시바도 경영 전권을 가진 전현직 사장 3명이 부정회계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일본 기업은 서구기업처럼 사외이사 등 내부 통제장치가 미약하다. 대기업에서는 주요 보직에 여성 임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권위적인 남성문화도 뿌리깊다. 이런 문화 탓에 2011년 올림푸스도 경영진이 분식회계를 자행했지만 취임 6개월 밖에 안된 외국인 CEO가 내부고발을 할 때까지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기업 내부에 비윤리적인 문제나 명백한 과오가 발생했을 때도 소비자나 이해관계자와 같은 ‘고객’보다 “조직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분위기가 지배한다. 내부고발자는 곧 배신자가 취급을 받는다.
미쓰비시는 2000년에 차량 결함과 리콜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다 탄로나는 바람에 무려 60만대를 리콜하며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결함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수년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를 해왔다는 점도 놀랍지만 불과 4년 후에 또다시 유사한 리콜 은폐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로 인해 다임러 크라이슬러와의 제휴관계는 청산되고, 10여년 동안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이번 연비조작 사건으로 내부DNA는 바뀐 게 없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연비조작 사건도 거래사인 닛산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내부적으로 쉬쉬하며 얼마나 지속됐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 세계 자동차업계의 리콜 사태를 불러일으켰던 에어백 제조업체 다카타는 리콜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도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허위보고를 하는 등 상식 이하의 행태를 보이며 고객사들에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증권투자 손실을 감추기 위해 일본 최대규모의 분식회계 스캔들을 저지른 올림푸스는 취임 6개월 만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내부 고발을 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해고하는 등 문제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지난 2000년에 최대 식품업체인 유키지루시는 1만3000명이 넘는 식중독 환자를 일으키고도 3개월 후에 늑장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행태는 소비자나 고객보다 조직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요즘 시대에 사무라이같은 ‘상명하복’ 문화를 벗어던지지 못한 대가는 혹독하다.
연비조작을 실토한 이후 불과 사흘 만에 주가가 40% 이상 폭락한 미쓰비시자동차는 또다시 생사의 기로에 섰다. 조사가 확
[도쿄 = 황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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