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영화 ‘쎄시봉’은 한국 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일으킨 가수 조영남과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등을 배출한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청춘들의 사랑, 우정 등을 담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들의 과거여행을 통해 그 시절에 대한 추억 선사와 잊고 지낸 첫사랑의 기억, 풋풋한 사랑과 우정, 귀를 사로잡는 옛 음악이 각 연령대별 극과 극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단순히 옛 음악을 들려주거나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등의 인기를 언급하는 게 다가 아니다. 이들을 통해 부모님 세대에겐 격한 공감대를 자녀 세대에겐 미처 몰랐을 부모님의 청춘에 대한 정보 전달로 소통하게끔 돕는다.
또한 엄격한 통금시간 제한과 두발 단속, 미니스커트 규제 등 시대 상까지 담아 이보다 더 친절한 복고영화는 없다. 영화만으로 충분히 1970~1980년대가 소개되고 있지만, 진짜 그 시절 그 세대를 겪었던 ‘쎄시봉 시대’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A(60. 남 / 교수)
B(57. 여 / 주부)
Q1. 당시 젊음의 거리 무교동 핫플레이스였던 음악감상실 ‘쎄시봉’은 7080세대에게 어떤 의미였나.
A : 음악감상실은 조금 수준이 있었던 곳이었고 그 당시엔 정말 다방들이 많았다. 웬만한 다방에는 아마추어 디제이들이 있어 음악을 틀어주면 많은 아가씨들이 디제이를 보려고 다방에 오랜 시간 앉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디제이 친구가 있어 여자들을 소개받을 경우도 많았다.
B : 쎄시봉은 젊은 그 자체였고 유일한 놀거리였다. 가면 늘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 시절에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음악감상실이나 다방이었다. 오비스케빈은 아침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생맥주 등을 팔았다. 주로 점심 대 방문해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자리에 앉으면 종이와 펜이 있다. 그 종이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디스크자키에게 건네주면 된다. 매우 보수적인 시대였기에 요즘처럼 헌팅은 흔하지 않았고 헌팅 자체만으로 얼굴이 빨개지고 창피한 일이었다.
Q2. 한국 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일으킨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등 당시 가수들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나.
A : 기존 음악의 장르를 포코송이라는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시킨 뮤지션들이었지만 대마초라는 사건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지 않았나 생각된다.
B : 이들의 인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중에서 윤형주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 역시 윤형주를 좋아했다. 우선 고급스럽게 잘생겼고 노래와 연주도 잘한다. 목소리까지 달달했다. 요즘은 가수들을 보고 꿈을 키우곤 하는데 당시에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 나도 저들처럼 노래하고 연주하자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Q3. 당시엔 가수들이 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이를 따라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 기타 배우기 열풍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A : 젊은이들이 대부분 기타를 가지려 했지만 가격이 비싸서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던 시절이었다. 특히 대학생들은 MT에 꼭 기타 한두 개는 메고 다니던 풍경이었다. 완행열차 안에서 기타 치며 놀았으며 해수욕장과 산, 들에서는 꼭 기타를 메고 다녔다.
B : 돈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기타를 배우지 못했던 시절이다. 아마 기타를 배우려는 이들은 많았을 것이다.
A : 그때 당시엔 지금보다는 보수적이었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연애를 즐겼다고 생각된다. 명동 예술극장 공연 관람 후 술 한잔 하다보면 통금이 있어 자연스럽게 여관을 가야 하는 환경이기도 했다. 택시를 잡아준다고 일부러 서울 변두리 가자고하면 택시가 그냥 지나갔고 그러면 하는 수 없이 통금시간을 피하려 여관으로 향하기도 했다. 또한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키스도 하고 스킨십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B : 다소 자유로운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제약이 많았다. 남녀가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걷기도 했다. 사귀는 사이어도 간격을 두고 걸었다. 손을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도 몰랐다. 물론 다방에선 몰래 잡았을 수도 있지만 다들 스킨십에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밀당과 썸 자체가 없었기에 무작정 좋아하는 남자의 고백을 기다렸다. 함께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는 것 자체가 이미 호감이었다. 편지를 통해 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화기가 별로 없었기에 주로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Q5. 남자는 두발 단속, 여자는 미니스커트 규제. 이는 현재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의 에피소드가 있는가.
A : ‘쎄시봉’에 장발 단속하는 장면이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데 없어서 아쉬움이 있다. 서울에서는 장발 단속을 안 하는데 인천에서는 하는 경우가 있어 안심하고 인천에서 데이트 하다가 봉변(경찰에 잡혀 머리를 깎이는 일)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미니스커트를 쳐다보려고 일부러 육교를 올라 다니는 일이 많았다.
B : 미니스커트를 입고 걸리는 일이 귀찮았기에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 다녔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미니스커트를 안에 입고 그 겉에 다른 치마를 입고 다녔다. 남편이 장발이었는데 장발 단속을 피하기 위해 무작정 달렸다고 한다. 한참을 도망가 앞을 바라보니 경찰서였다고.
Q6. 김인권(조영남), 진구(이장희), 강하늘(윤형주), 조복래(송창식)와 실제 쎄시봉 멤버들과의 싱크로율은 어떤가.
A : 영화라 그런지 싱크로율은 좀 떨어진다.
B : 이장희 역을 맡은 진구의 싱크로율이 높았던 것 같다. 이장희 만의 개성을 잘 드러내준 것 같다.
A : 동전을 많이 준비하고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었고 아무래도 지금 보다는 굉장히 불편했다. 그 당시는 다방에 전화를 걸어 손님 중에 누구를 바꿔 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B : 전화보단 주로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직장인들은 교환양을 통해 전화를 거는 경우도 있었다.
Q8. 당시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당시를 살아왔던 7080세대들에 있어 이런 조치는 어떻게 다가왔나.
A : 그때 당시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B :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으면 됐고 어기지 않으면 됐다.
끝으로 영화에 대한 한줄평을 남기자면.
A : 아쉬운 점은 장발 단속과 신호위반과 불법 도로횡단 단속 풍경이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B : 영화를 보는 내내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소 살벌한 지금과 달리 당시는 인간적이고 소박했다. 때문에 순수했던 당시의 기억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7080세대를 위한, 옛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개봉됐으면 좋겠다.
최준용 기자, 박정선 기자, 여수정 기자 luxurysj@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 사진=포스터,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