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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신성일 발인 사진=MK스포츠 천정환 기자 |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는 故신성일의 영결식이 진행됐다.
이날 영결식은 배우 독고영재가 사회를 맡았으며,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故신성일의 장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배우 안성기, 한국영화인 총연합회 지상학 회장을 비롯해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해 유족들과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안성기, 이덕화, 김형일 등 영화인들의 도움으로 영정이 입장하고, 영결식은 시작됐다. ‘맨발의 청춘’ ‘조우’ ‘내시’ ‘휴일’ 등 대표작을 남긴 고인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지인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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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신성일 영결식 사진=MK스포츠 천정환 기자 |
한국영화인 총연합회 지상학 회장은 “한 시대 아이콘으로 불려왔다”라며 “선배님, 왕도 되고 연인도 되고 만인의 연인으로 살았으니 이생의 미련을 버려도 될 것 같다. 실연, 아픔도 있지만 선배님 같은 축복과 은총을 누린 사람이 얼마 있겠나. 지난 시절 당신이 있었기에 행복했고,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행운이었다”라고 조사를 낭독했다.
이어 “(고인은) 한국 영화의 역사이고, 전설이고, 신화였다. 신성일 선배님은 하늘에서 별이 졌으니 영화를 더욱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라고 한 말을 이 다음과 같은 말로 조사를 마무리한다. 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육신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불과 한 달 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걸어오던 신성일 선배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은 무한한 든든함이었다”라며 “(고인은)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셨다. 50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 (또) 1960-70년대 관통하는 사회상의 표상이자 스타였다. ‘맨발의 청춘’에서 보여주신 댄디한 모습은 그 당시 어떤 배우도 보여주지 못한 남성상을 보여줬다”며 다시 한 번 故신성일이 세운 공을 언급했다.
오 위원장은 “고인 한국협회이사장,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했다. 내년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해 한국영화 상징적인 분을 재조명하고 함께 하고자 했다. 영화계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선배님의 말을 듣고자 했다”면서 “매순간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줬다. 선배님의 진정과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사랑한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 저희 또한 선생님이 그토록 사랑한 한국영화가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평안하고 행복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며 추도 선언문을 끝마쳤다.
독고영재도 고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내년 만나기로 한 약속이 평생 지킬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헌화와 추모 인사가 끝난 뒤 고인의 아내 엄앵란은 “아침부터 정말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사진을 보니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라는 생각이 들구려. 나는 울면서 보내고 싶지 않다. 왜 안 우냐고 하는데 울면 그 망자가 걸음을 못 걷는다고 한다”라며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故신성일은 1960~1980년대 풍미했던 한국영화계를 대표 배우다. 총 513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불려왔다. 또한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으며, 영화계 발전에 힘을 쏟아왔다.
폐암 진단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이어갔던 고인. 아픔 속에서도 끊임없이 영화계에 발전을 도모했으나 끝내 별은 지고 말았다. 한국 영화계에 수많은 업적을 그려냈던 그를 기리기 위해 배우 최불암, 이순재, 김수미, 박상원, 임하룡, 나영희, 강석우
한편 이날 영결식이 끝난 후 서울 추모공원으로 옮겨 화장한다.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오는 7일에는 영천에서 故신성일 추모제를 진행할 예정이다. 신미래 기자 shinmirae93@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