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주년을 맞아 한·일 관계가 극적인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한·일 정상회담 가능성이 부쩍 높아졌다. 한·일 정상회담 성사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남은 과제는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와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입장 표명 그리고 오는 8월 예정된 종전 70주년 아베 담화 등으로 압축된다.
■세계유산 등재 ‘청신호’
한·일 관계에서 갈등의 불씨가 됐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첫 도쿄 외무장관 회담에서 메이지 산업시설 세계유산 문제와 관련해 “큰 틀에서 합의가 됐다”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이런 사례를 통해 다른 문제도 선순환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메이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가 양국간 대화를 통한 관계개선의 본보기로 떠오른 셈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나가사키 군함도를 포함한 23곳의 메이지 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하면서 1850년~1910년 메이지 산업혁명 시대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제징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강제징용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한국 측에서는 강제징용 역사가 서려있는 7곳에 대해서는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국제사회를 통해 일본을 압박해왔다.
한국의 압박이 조금씩 먹히면서 일본도 태도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도쿄 외무장관 회담에서 양국은 문화재에 대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협조하면서 상호 이해를 넓혀나가기로 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에 한국측 도움을 받는 대신 강제징용 역사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킬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은 자칫하면 세계유산 등재에 실패할 수 있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한국도 강제징용 역사와 관련한 역사를 반영하도록 원하는 수준을 얻어냈다는 전망이다.
하지만 세세한 협의가 진행되는 과정에 이견이 불거질 가능성은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처럼 구체적 협의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서는 현재 2차 실무자 협의가 진행된 상태로 곧 3차 협의를 진행해 상세한 결론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평행선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 간에 팽팽한 이견을 보이고 있는 현안이다. 한일 정상회담 전제조건이 아니라지만, 실질적인 전제조건으로 걸려있는 것이 위안부 문제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국이 지난해 4월부터 올해까지 모두 8차례 협상을 진행해왔다. 정부 관계자는 “작년 협상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현재는 상당히 의견이 좁혀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국간 인식의 격차는 여전히 큰 상태다. 일본 정부 관계자도 실무자선에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는 만큼 ‘점프’(지도자간 정치적 결단)가 필요하다며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양국이 협상이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협상과정에 대해 함구하고 있지만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안은 일본의 과거 민주당 시절 내놨던 ‘사사에 제안+ 알파’로 알려져있다. ‘사사에 제안’이란 2012년 3월 당시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 정부에 제시했다고 알려진 제안으로, 일본 총리의 사죄편지와 일본 정부 예산으로 배상한다는 내용이다. 사사에안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베 정부 위안부 인식은 민주당 시절 인식보다 크게 후퇴해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아베 정권은 지난해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오보 인정 이후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미 국교정상화 당시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청구권은 해소됐다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최근 일본 보수언론에서도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위안부 배상 등을 평가하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일본내 여론 역시 위안부에 대한 책임은 이미 끝났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게다가 일본측은 위안부 협상과정에서 한국측에 국내외 소녀상을 철거할 수 있는지, 과거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노력을 평가할 것인지, 이번이 최종적으로 마지막 위안부 협상인지 등을 확답하라는 요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최종단계”라는 언급이 나온 이후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여전히 일반인의 인식과는 괴리가 큰 게 사실이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는 정부간 협상을 넘어 위안부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와의 내부 조율과 설득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조기에 협상결과를 끌어내기엔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처럼 여겨지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뀔 조짐이 보이고 있어, 역사문제는 역사문제대로 지속적으로 협상을 벌여나가면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베담화 ‘개인의견’으로 격하?
한중일,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고비는 오는 8월 15일 전후 70년을 전후해 발표될 예정인 아베 담화다. 한중일 3국 정상회담과 관련해 중국은 아베 담화를 지켜본 후에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담화와 관련해 포인트는 과연 아베 담화에 무라야마 담화(50주년)와 고이즈미 담화(60주년)에 포함됐던 식민지 지배와 침략, 통절한 반성, 사죄 등의 핵심 단어가 포함되느냐 하는 점이다. 아베 총리는 아베 담화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지난 반둥회의(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연설과 미 의회 연설을 통해 과거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 또는 ‘통절한 반성’ 을 내놨지만 식민지 지배와 침략, 사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이미 과거 담화와 똑같은 내용이라면 담화를 내놓을 이유가 없다거나, 단어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일본의 보수언론조차 굳이 침략이나 사죄 단어를 빼 담화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보다 넣는 것이 낫다는 논조가 나오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한국과 중국을 만족시킬 만한 담화가 나올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에서 절충점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베 담화를 정부 공식 의견이 아닌 개인적인 담화로 발표하는 방안이다.
요미우리신문은 22일 아베 담화와 관련해 내각 결정을 보류하기로 방침을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는 내각 각료의 서명을 받아 정부 공식으로 발표됐지만 아베 담화는 이런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기존 총리들의 담화에 구애받지 않고 담화를 발표하는 한편 중국 한국 등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이 있다는 분석이다. 개인적인 담화로 형식이 바뀔 경우 식민지 지배와 침략, 사죄 단어가 포함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도쿄 = 황형규 특파원 / 서울 = 이진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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