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자 할머니 |
박춘자 할머니(86·사진). 이제는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지만 2008년 그는 ‘김밥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할머니였다. 평생 남한산성 자락에서 노점상을 열고 단속원들 눈치를 보며 김밥을 팔아 모은 3억원을 그 해 여름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쾌척했다.
김밥말이개를 돌돌 말아 3억원을 모았다는 것도 신기했거니와, 그 ‘피같은’ 돈을 어떻게 손에서 놓았을지 지금도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뜨거운 온정이었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매일경제의 인터뷰 요청에 그는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잠시 대화의 자리를 내줬다.
그 해 통큰 기부와 함께 수중에 모아둔 돈을 모두 정리한 박 할머니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J요양원을 새 거처로 삼아왔다. 안타깝게도 청력이 많이 약해진 듯 간간이 기자의 입모양을 보고 질문 내용을 유추하는 눈치였다. 다행인 점은 미수(米壽)를 앞둔 고령임에도 대화에는 유머가 가득했다.
박 할머니는 “나 이제 돈 없어. 또 기부하라고 온 건 아니지?”라며 웃다가 “지금도 수중에 돈이 있으면 아파도 병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 해 박 할머니가 세상에 내놓은 기부액은 3억원이 아닌 6억원이었다. J요양원에서 시간 날 때마다 가족 같은 장애우들을 보기 위해 들르는 이곳 시설이 바로 ‘숨겨진 3억원’의 실체였다. 박 할머니는 2008년 3억원을 기부하기에 앞서 현 성남시 장애인 복지시설을 만들기로 하고 사비 3억원을 털어 부지를 매입했다. 그의 기부 취지에 공감한 한 대기업이 건물 공사를 무상으로 해주면서 성남시 장애인을 위한 작은 보금자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J요양원으로 입소하며 통장에 남아 있던 2000만원을 인출해 1000만원을 한 어린이 재단에, 남은 1000만원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또 다른 자선단체에 전달했다.
이제는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용돈을 쓰며 병치레라도 하게 되면 입원비부터 걱정해야 할 신세지만, 박 할머니는 지금도 당시 기부가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시방은 돈이 없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아껴서 살면 된다”며 “아껴서 모은 걸 자식들에게 줬다가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버릇만 나빠지게 만드는 부모가 오히려 불쌍하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서도 자식들이 요양원까지 찾아와 부모 돈을 빼앗아 가는 일이 더러 발생한다고 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모은 돈을 왜 갑자기 사회에 환원했는지 궁금했다.
“돈이 좀 모였을 때 잠깐 펑펑 쓴 적이 있어. 친구들 불러서 맛있는 것 먹고 노래방도 가고 열심히 놀았지. 그런데 갑자기 후회가 들더라고···.” 박 할머니는 “내가 목숨을 걸고 번 돈인데 이걸 좀 의미 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며 “과연 어떤 기분일까 했는데 막상 일(기부)을 저지르고 나니 정말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말했다.
그가 돈벌이를 “목숨 걸고 했다”고 말한 데는 젊은 시절의 아픔도 한몫했다. 아이를 못 낳는다며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시댁에서 맨몸뚱이로 쫓겨난 뒤 세상은 엄혹한 생존의 시험대였다. 함바(공사장 식당), 남한산성 김밥 장사 등 지금도 뼈마디가 욱씬거릴 과거사를 얘기하면서도 박 할머니는 “내가 손맛이 좀 있어. 닭발요리도 잘했고”라며 오히려 즐겁게 과거를 떠올렸다.
박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던 이달 초 한국의 모든 신문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 부부가 52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기부 약정을 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마크 저커버그가 누군지 알리 없는 박 할머니에게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오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박 할머니는 씨익
한 시간여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취재진에게 뭐가 아쉬웠는지 박 할머니는 황급히 붙잡으며 빨갛게 익은 홍시 두 개를 건넸다.
[성남 =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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