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오늘은 어떤 날이었을까.
'오늘裏面'은 이러한 궁금증으로 시작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뉴스와 사건들 속에서 울고 웃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오늘이면은 과거의 오늘이 가진 다른 의미를 추적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소외당하고 잊혀질 뻔한 사실들을 적습니다.
오늘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가 진실을 가두고 땅에 매장해도 그것은 싹이 트고…" -에밀 졸라
66년 전 오늘, 12월 24일은 문경양민학살 사건으로 8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날입니다.
가족과 연인이 행복을 나누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분위기에 들뜬 12월 24일. 한편에선 가슴 시린 마음을 부여잡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문경양민학살 사건의 생존자와 유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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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사진=MB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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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석달마을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합동위령제/사진=연합뉴스 |
1949년 12월 24일 조용하던 경북 문경시 석봉리 석달마을이 갑자기 총성과 화염으로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겁니다. 방아쇠는 어린아이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공비 토벌 명목으로 정찰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는 부대가 와도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빨갱이 마을'로 몰아세우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참혹한 학살 끝에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6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사건 후 주민들은 마을을 등졌고, 일부는 사라진 마을 터 근처에 새로 집을 지어 한 맺힌 마음을 달래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군은 학살을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사건은 정반대로 북한 공비들의 소행으로 각색됐습니다. 군 관계자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공비들이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거짓 보고를 했고, 군 당국은 “공비가 국군으로 변장해 마을에 침입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유족들은 이 같은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고. 이후 진상규명 움직임이 있었으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2007년 6월.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목격자와 참고인 진술, 피살자 자료를 토대로 "문경학살사건은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선별절차나 법적 근거 없이 집단학살한 사건으로 명백한 위법행위"라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묻혔던 진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이후 유족들은 반세기가 넘은 2008년 7월이 돼서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6월, 유족은 아픈 가슴을 한번 더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대법원이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금 액수가 너무 많다며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겁니다. 문경양민학살 사건의 경우 총 47억여 원의 배상금은 12억여 원으로 줄었고 당시 유족들은 배상금을 이미 지급 받은 상태였기에 줄어든 배상금과의 차액을 반납해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대법원의 판결이 지나쳤다는 논란이 있었고 법원은 ‘피해자의 목숨 값을 깎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념 대립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는 12월 24일 한 마을을 무참히 파괴하면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어떻게 위로하고 사회에 복귀시키며,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는 미래를 위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즉 국가폭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배상금이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반세기가 넘도록 숨죽여 살아야 했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인지는 계속 논란거리가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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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 명동/사진=MBN |
66년이 지난 오늘. 거리에는 징글벨이 울리고 성탄 트리는 화려하게 불 밝힐 준비를 합니다. 지난
[MBN 뉴스센터 한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