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반 이후 터무니 없는 수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전전 같은 수였다.
대국 초반 ‘인공 지능’ 알파고는 거의 실수 없는 수를 한수 한수 호기롭게 두어 나갔다. 당황한 것은 이세돌이었다. 지난 해 10월 알파고와 대국을 벌인 뒤 “바둑을 둘수록 알파고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완전체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게 큰 압박이 됐다”는 판후이 2단이 느꼈던 기분이 그대로 이 9단에게도 전달된 것 같았다. 이세돌이 “5개월 업그레이드 됐어도 ‘선’ 즉 한점 정도 기력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알파고 실력과는 전혀 달랐다.
특히 포석과 대국 초반에 약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바둑TV 해설을 맡은 유창혁 9단은 “중반에 돌입한 모습만으로는 전혀 형세를 알 수 없다. 알파고가 상당한 것 같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세돌 얼굴에서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포석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알파고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초반 이세돌 바둑이 좋지 않았고 인공지능의 약점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알파고에 창조적인 수는 별로 없었지만 결코 실수가 없었다. 수많은 프로기사 수를 입력한 알파고는 정석의 수만을 뒀다. 이세돌에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창의성 넘치는 직관’을 기대해야 했다. 이세돌은 자서전 ‘판을 엎어라’에서도 자신의 창의성 얘기를 많이 했다. “99명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수가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내 안에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알파고는 인간 바둑 기사 같았다. 빠를 때는 빠르게, 늦을 때는 느리게 수를 뒀다. 이세돌로서는 정말 인간 바둑기사를 상대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30분을 먼저 쓴 것은 이세돌이었다. 하지만 중반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알파고가 더 시간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시간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초읽기에 들어간 것도 알파고였다. 이세돌에 비해 두배는 빠르게 둘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바둑에서 감정이 없다는 것은 절대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시간에 쫓기거나 당황하면 터무니 없는 수를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파고에게 감정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세기의 대결’이라는 부담은 이세돌을 크게 압박했을 것이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의 약점 하나로 지적한 부분이 바로 ‘과연 전체를 읽는 직관이 있느냐’하는 점이다. 실제로 중반이 넘어가면서 알파고에게서 이해가 가지 않는 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프로기사라면 두지 않을 악수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라고 모두 같은 프로가 아니다’며 이세돌의 승리를 장담했던 다른 프로기사들의 예상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세돌이 이긴다는 데 100%를 걸겠다”는 중국 바둑랭킹 1위
하지만 이세돌 실수가 컸다. 그가 하루 전 간담회에서 말한 ‘인간’적인 실수일 것이다. 어쩌면 이날 승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오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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