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수도'로 불리는 울산·미포 국가산업단지. 요즘 이곳을 지켜보는 울산 시민들은 착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다.
한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추동한 이 거대한 산업 클러스터가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한국 경제의 위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된 탓이다.
산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태화강을 경계로 지역경제를 먹여 살리던 강 북서쪽의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이 최근 중국 사드보복 등으로 해외판매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북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조선·해양플랜트 단지는 '수주 절벽'으로 지난해부터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유일하게 태화강 남쪽 아래에 위치한 정유화학 클러스터만이 글로벌 수요 증가에 힘입어 지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외로운 질주'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산단 입주 업체들 사이에서는 "'변전소 사거리' 말고는 요즘 차가 막히는 곳이 없다"는 씁쓸한 푸념이 나온다.
자동차·조선 관련 일감이 사라진 탓에 정유화학 진입로(변전소 교차로) 말고는 물동량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실제 지난 26일 매일경제가 찾은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해양사업본부는 적감함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100만㎡(30만평) 규모의 드넓은 야드에서 진행되는 작업이라고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나스르 해상 플랫폼 1기 공사가 유일했다. 불과 3~4년 전 최대 5기의 초대형 해양 플랜트 구조물이 한꺼번에 건설되면서 느껴졌던 활력과 분주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스웨덴 말뫼에서 1달러를 주고 들여와 '말뫼의 눈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1600톤급 대형 크레인도 이날 거의 가동되지 않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부유식 원유생산저장 하역설비(
산업의 전후방 연계성이 큰 자동차 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날 현대차 울산공장은 현대차 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지부장 투표 때문에 공장 가동을 멈췄다. 노사 단체협약에 따라 노조 지부장 투표일은 유급휴일이다. 직원들은 투표를 하고 바로 귀가했다. 울산공장은 올해 임금과 단체협상이 무산된 이후 정상조업을 하고 있지만 울산5공장 제네시스 생산라인 등 일부 라인은 판매 부진으로 특근이 줄어들고 있다. 제네시스 생산라인은 지난해 1~7월까지 총 52회에 걸쳐 특근을 했다. 하지만 올해는 특근이 고작 6회뿐이다.
협력업체들은 완성차 업체의 몸살에 '생존'의 위기를 느낄 정도다. 현대차 협력업체인 한국몰드는 버스와 트럭 판매 부진으로 납품 물량이 줄어 이번 추석연휴 때는 아예 내수용 부품 공장을 가동하지 않을 계획이다. 이곳의 한 자동차용 페인트 생산업체도 중국의 현대차 사드 보복 이후 매출이 70%까지 떨어졌다. 인근 경주에서도 현대차 2차 협력업체도 현대차 노조 파업과 매출 부진으로 최근 회사를 매각했다.
유일하게 정유화학 클러스터만이 지난해부터 글로벌 수요 증가에 따른 슈퍼사이클(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 지난 8월 말 허리케인 하비로 인해 미국 휴스턴에 밀집한 정제시설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한국 정유사들이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정유화학 단지에 입주한 한 업체 관계자는 "정유사 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제마진까지 개선되면서 올해 정유사 영업이익률이 최고 수준을 기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10달러에 육박해 지난 상반기 평균(6달러)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태화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기업들의 극단적 업황 현실은 지역경제 위기로 전이되고 있다. 한국은행 울산본부가 지역 소재 256개 업체를 대상으로 기업경기를 조사한 결과, 8월 울산지역의 제조업 업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58로 전달보다 16포인트 하락했다. BSI가 100을 밑돌면 그만큼 경기에 대한 비관론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한은 울산본부는 "자동차 및 금속제품 제조업 등에서 매출, 생산 감소 등의 영향으로 BSI가 급락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가산단 입주기업들의 일감 절벽에 지역상인들은 악소리를 내고 있다. 조선사들이 밀집한 울산 방어동의 한 음식점은 월 매출 1억5000만원을 자랑하다 매출이 반토막이 났다. 2년 전만해도 아파트 분양권에 1억원 이상 프리미엄이 붙었던 부동산 시장에서는 '프리미엄'이라는 단어가 사라진지 오래다.
자동차·중공업 관련
이곳의 한 주민은 "평일 낮에도 아파트 단지에 주차를 할 곳이 없다. 일감이 줄어서 직장인들이 출근을 안 하고 집에만 머물러 있으니 때아닌 주차난이 생긴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울산 = 서대현 기자 /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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