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상철 기자] 스포츠계에서 소싯적 공 좀 다루는 선수는 천지에 깔려있다. 흔히 ‘천재’라고 부른다. 천재의 사전적 정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야구계에도 수많은 천재가 뜨고 졌다. 그러나 그 재능을 갖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 그리고 대개 그들에겐 ‘비운’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어쩌면 그 ‘비운’ 때문에 빛나지 못하면서 안타까움이 더해지기도 한다.
비범한 선수들이 쏟아졌던 1990년대, 강혁(39)이라는 한 명의 야구천재가 있었다.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화려했다. 국제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온 프로 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 오히려 이중 계약, 영구 제명, 음주 운전, 병역 비리 등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렸다.
2007년 프로야구계를 떠났던 그가 2013년 말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지도자다. ‘친정’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프로에서 선수로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그는 지도자로서 성공을 다짐하고 있다.
2007년 SK를 떠났던 강혁은 2013년 말 비룡군단으로 돌아왔다. SK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잘 알고 있다. 사진(인천)=이상철 기자 |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83년 강혁은 야구선수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1년 전 출범한 프로야구의 영향이 컸다. TV 브라운관을 통해 보던 야구선수가 신기했고 멋져 보였다. 야구부 코치의 권유 속에 글러브와 배트를 잡은 그는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리고 그 길은 순탄했다. 그에겐 ‘타격 천재’라는 별명이 생겼다.
신일고 2학년이던 1991년 선배 조성민, 설종진, 동기 백재호, 후배 김재현, 조인성과 함께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우승을 일궜다. 그리고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강혁은 “운동 신경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신체조건이 남들보과 비교해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며 “정상을 지키는 게 더 힘들다. 내 성격상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걸 감당할 수 없더라. 노력을 참 많이 했다. 남들이 볼 때 놀다가도, 남들이 없을 때 열심히 했다. 내 한계를 넘겠다고 밤새 스윙 연습을 하기도 했다. 각종 대회에서 타격상을 거머쥐었지만, 만족을 몰랐다. 승부욕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그 노력 속에 강혁은 최고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한양대 진학 후에도 강혁은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다. 특히, 1995년 대학야구춘계리그 연세대와 결승전에서 ‘에이스’ 임선동이 2회 2사 만루에서 강혁을 고의사구로 1점을 헌납한 건 유명한 일화였다. 그날 임선동에게 고의사구 2개와 함께 홈런 1방을 날렸다. 강혁은 “그때 준결승까지 홈런 5개를 쳤는데 공이 정말 크게 보이더라”라며 껄껄 웃었다.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놀란 건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국제 스카우트였다. 투수를 찾으러 왔다가 강혁을 보고 흠뻑 빠졌다. 강혁의 메이저리그행을 추진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1998년 LA 다저스의 신분 조회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없던 일이 됐다. 밖에서 관심을 보이더라도, 영구 제명 때문에 강혁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강혁은 “어차피 영구 제명 때문에 안 됐다.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해외 진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체구도 작고 몸도 약해서 잘 할 수 없을 것 같았다”라며 “그래도 지금쯤 생각하면 여건이 돼 갈 수 있었다면 그냥 도전하는 건데 아쉽다. 그래야 후회라도 안 될텐데”라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간 프로인데
아마추어 무대는 좁았다. 그렇지만 그 좁은 무대에서 오래 뛰어야 했다. OB 베어스(현 두산) 및 한양대와 이중 계약을 하면서 강혁은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징계가 풀리지 않는 한 프로에 갈 수 없는 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실업팀 현대전자 피닉스에 입단했다. 프로에서 뛰는 친구들과는 다른 길이었다.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프로와 아마추어 혼성으로 참가한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그를 둘러싼 얼음들이 녹았다. 당시 박용오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1999년 영구 제명 징계를 해제하고, 두산에 입단하도록 총재 직권을 결정했다. 프로 야구선수를 꿈꾸며 배트를 쥔 강혁은 16년 만에 그 꿈을 이뤘다.
그러나 반쪽짜리였다. 반발하는 일부 구단이 있으면서, 강혁은 하반기부터 출전할 수 있었다. 1군은커녕 2군에서도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훈련만 했다. 25세로 한창 프로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키워나가야 시점인데, 경기 감각 부족은 치명적이었다. 강혁은 프로 첫 해 15경기 출장에 그쳤다.
강혁은 “가뜩이나 남들보다 프로에 늦게 왔는데 1년 가까이를 쉬게 하니 선수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다. 그 시기가 참 중요했는데 많이 아쉽다”고 한탄했다.
보란 듯이 일어서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노력은 땀을 배신하지 않았다. 강혁의 타격은 화려했고 매서웠다. 1루수 겸 6번타자로 활약했으며, 신인왕 후보로도 거론됐다. 1년 전과 비교해 기막힌 반전이었다. 그러나 8월 사고가 터졌다. 음주운전 후 뺑소니 사건을 일으켜 구단으로부터 무기한 훈련 및 경기 출전 금지, 벌금 50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어떻게 올라갔는데 다시 미끄러졌다. 강혁은 “그 해 타이론 우즈도 1루에서 밀어낼 정도로 정말 잘 했다. 그렇지만 프로 경험 부족에 따른 체력 저하와 함께 8월 사고로 인해 내리막길을 탔다”고 했다.
이듬해인 2000년 강혁은 SK로 트레이드됐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두산에 남아 프로 생활을 하고 싶던 강혁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선수 이동이 잦지 않았던 시기라, 배신감은 컸다. 두고 보자고 각오를 다졌건만, 친정팀에 비수를 꽂을 일은 많지 않았다.
몸이 문제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경기를 뛰었는데, 어깨 통증을 참는 것도 한계였다. 수술이 불가피했다. 재활 치료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몸 상태가 정상적이진 않았다. 강혁도 조급한 마음이었고, 여유를 잃었다. 마음은 쫓기고 부상은 잦은 데다 되는 건 없었다. 그러다 병역 비리로 인해 군 복무를 다시 해야 했다. 2005년과 2006년, 강혁은 프로에 없었다.
강혁은 프로 생활의 마지막을 SK에서 마쳤다. 그리고 프로 지도자의 첫 발을 SK에게서 내딛는다. 최고의 타격코치가 돼 프로 지도자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나타냈다. 사진=SK 와이번스 제공 |
2007년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절실함 속에 돌아왔지만 강혁은 그해 현역에서 물러났다. 대타, 대수비 역할만 하며 설 자리를 잃은 강혁은 SK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다른 팀에 가서 원 없이 야구를 하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지만, 자신만은 몰랐다. 입단 테스트도 했지만, 성치 않은 몸은 이번에도 그를 옥죄었다.
강혁은 “발목, 발등 등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이제 그만둬야 할 시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선수 틈바구니에 끼어 한번 살아보려 했는데 자존심도 퍽 상했다. 야구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렇게까지 야구를 해야 하나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미련없이 그만두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자 마음 먹었지만, 그를 불러주는 프로 구단은 없었다. 모교 등도 이미 코칭스태프 구성이 끝났다. 2년간 돌아다니면서 방황 아닌 방황을 했다.
야구계를 떠났지만 그의 몸에는 야구의 피가 흘렀다. 정신을 가다듬고, 직접 야구단을 창단했다. 공익근무요원을 하며 인연이 닿았던 인천시 남구에 리틀야구단을 만들었다. 야구에 야자도 모르는 이들을 데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키고, 하나부터 열까지 업무를 하면서 긴 시간을 보냈다.
다시 야구를 하겠다며 밑바닥부터 일하는 그에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창단 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하는 등 ‘지도자’ 강혁의 능력은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SK로부터 ‘콜’을 받았다. 언젠가 프로로 돌아가겠다고 목표를 세웠지만, 예상보다 더 빠른 부름이었다. 그렇지만 망설였다. 자기만 믿고 와준 야구단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그러나 주변의 권유 속에 다시 문학구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SK 2군 타격코치, 강혁의 새 직함이다. 강혁은 “솔직히 평생 (SK에는)못 올 줄 알았다. 트레이드 요청건도 그렇고, 내가 직접 박차 나간 건데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떠난 사람을 다시 불렀다는 건 의미가 크다. SK의 미래인 2,3군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잘 키워달라는 것인데, 이를 잘 알기에 매우 고맙다”라고 말했다.
정식으로 부임해 선수들을 가르친 지는 1달도 안 됐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제 옷을 입은 듯. 유소년과 프로를 가르키는 건 엄연히 다르지만,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강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다르다. 여기는 프로다. 각각 주관도 뚜렷하다. 내가 획일화시키며 가르치기보다 그들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지도하는 게 중요하다.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선수들도 처음에는 못미더워하더니 이제는 잘 따르더라”라며 웃었다.
2년의 방황 끝에 세운 목표는 이뤘다. 그렇지만 그의 종착점이 고작 프로 지도자는 아니다.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했기에, 꿈은 더욱 크다. 타격코치하면 강혁이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게, 타격코치의 1인자가 되는 게 그의 현재 목표다.
어려운 시기 속에 성숙해졌다는 강혁은 “난 이제 스타가 아니다. 1년만 못해도 다 잊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도 이제 내 이름을 다 잊었다”라며 “(이)병규나 (진)갑용이는 여전히 선수로 뛰고 있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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