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강윤지 기자] 오전 5시 반이면 절로 떠지는 눈. 등산으로 활기찬 아침을 연다. 낮에는 집 근처 단골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시간도 보내보고 지인들도 만난다. 감독 시절에는 바빠서 하지 못했던 독서도 하고, 집안일도 살뜰히 손보고 있다. “아내가 참 좋아하는데, 아무리 해도 표도 안 나더라”며 새삼 집안일의 어려움을 느끼는 중이다. ‘야인’이 된 조범현(57) 전 kt 위즈 감독의 그라운드 밖 하루는 참 길다.
프로 감독으로 지내면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없으니 주위에서는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제는 잠도 설치지 않는다. 그래도 마냥 편하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마음 한편에는 그리운 곳이 존재한다.
↑ ‘야인’으로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조범현 전 kt 감독. 사진=김영구 기자 |
조 전 감독은 지난 시즌 중 kt와 재계약을 두고 일찍이 구두합의를 봤다. 그러나 이후 선수단에 사고가 생기면서 정식 계약 및 발표가 잠정 연기됐다. 속앓이를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시즌을 마치고 돌아온 건 재계약이 불가능하다는 답변. 결정은 구단의 몫이지만 그 과정이 상당히 껄끄러웠다. 조 전 감독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마음까지 추웠던 지난겨울, 그는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봄이 오고 새 시즌이 시작되면서 마음은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어느 팀의 감독으로는 아니지만 야구인 조범현의 새 시즌은 자연스레 시작돼 있었다.
경기 시작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TV를 켜고 중계를 본다. 상위권 팀들의 야구는 연구 대상이 된다. 특히 유심히 보는 건 선두를 달리고 있는 KIA 경기다. 조 전 감독은 “지난 2년 동안 김기태 감독이 팀을 참 잘 만들어놓았다. 어떻게 좋아졌는지를 체크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생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는 kt 경기도 자주 본다.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응원도 많이 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한 관계자에게 연락해서 이기라고 응원했는데 그날 이겼다. 당연히 마음이 쓰인다. 창단하면서 젊은 선수들과 씨름하고 했는데... 다들 잘 돼야 한다.” 몸담았던 팀에 애정이 가는 건 막을 수 없다.
지난달까지는 아마추어 선수들을 지도하기 위해 지방에 머무는 일이 잦았다. 2012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위원장으로 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지인들의 부탁을 받고 개인적으로 재능기부를 하는 차원이었다. 어떤 지원도 없었지만 한국 야구의 큰 기둥이 될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보람이 컸다. 지방에 한 번 내려가면 며칠씩 머무르며 선수들을 가르쳤다. 더욱 중요한 건 코치들에게 방법을 전수하는 일이었다. 포수를 전문적으로 선수들을 가르칠 코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 전 감독은 코치들에게 훈련 방법을 단단히 일러두고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조범현의 유산’은 지도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자부심이다. 사진=김영구 기자 |
조 전 감독에게서 뗄 수 없는 수식어는 ‘리빌딩(re-building) 전문가’다. 과거 SK, KIA를 상위권 성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맨땅에서 시작하는 ‘빌딩’을 한 kt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평가가 이루어질 터다.
혹자는 ‘조범현의 유산’이라고도 한다. 다만, 그가 농사에 들인 수고에 비해 직접 열매의 단맛은 많이 보지 못한 편이다. 그가 팀을 잘 꾸려놓은 덕에 후임 감독들이 많은 덕을 봤다는 평가가 많다. 그가 그라운드를 떠나있는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울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 전 감독의 생각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만 좋았다 이런 건 말할 것이 못 된다고 본다. 현재 내 할일이 있고, 그 팀의 전력, 상황과 환경에 맞게끔 움직이는 게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잘 다져놓고 뒤에 오신 분이 성적을 내면 같은 야구인으로서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감사하다. 내가 그 당시 시간을 잘 보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이 없는 만큼 자부심이 크다. “맡는 팀이 항상 하위권 팀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내 사명감 같다. 초석을 잘 다녀놨다는 게, 그것만으로도 내 역할은 잘하지 않았나 싶다”고 뿌듯해 한다. 선수를 감별하는 눈에 기다림이 더해져 나타난 결과라고. 자신의 판단대로 밀고 나가 단 열매를 수확했다는 자부심도 크다.
KIA 시절 기회를 주고 기용했던 선수들은 이제 팀, 더 나아가 국가를 대표하는 주축 선수들이 됐다. “모든 선수에게 애착이 간다. KIA (양)현종이 때는 욕을 참 많이 먹었다. 양아들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판단한대로 밀어붙인 게...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지 않았나.” 지도자로서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날’을 꿈꾸며 대비하고 있다. 사진=김영구 기자 |
처음 감독이 됐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2003년 SK에서 처음 감독이 됐을 당시 조 전 감독은 40대 초반의 젊은 사령탑이었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삼성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 때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배터리코치가 된 이후에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10년을 열심히 하니 주변에서 좋게 평가했던 것 같다. SK에서 감독을 할 수 있겠느냐고 연락이 왔는데, 바로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감독 초창기 시절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베테랑 감독이 돼 있다. 많은 것을 이루었다. 팀 전력을 잘 만들어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고 리그 우승, 국가대표 우승도 해봤다.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꾼다. “기회가 된다면 우승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야구 인생에서 기쁜 일이 여럿 있었는데 KIA 시절 리그서 우승을 일군 경험은 언제 돌아봐도 큰 힘이다.
반대로, 최근 3년여 동안은 야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팀 내 사정만 보느라 막상 상대와는 제대로 겨뤄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자리한다. 조 전 감독은 “어느 정도 싸울 전력 정도만 갖춰져 있어도 상대와의 수싸움이 가능했을 텐데 그런 걸 못했던 것 같다. 팀 자체가 형성이 돼 있었던 SK, KIA와는 달리 kt는 신생팀이니까 선수들을 쓰고 밑에서 올리고 하는 상황(1·2군 관리 운용) 자체가 안 돼서 힘들었다”고 아쉬운 기억도 함께 꺼낸다.
지도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올해도 계속 배움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길은 여러 갈래다. 여름이 되면 해외 리그를 돌며 공부해야겠다는 계획도 있는 한편, 그보다는 국내 야구를 좀 더 집중해서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나라의 현재 프로야구 분위기, 흐름을 꾸준하게 갖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은 유효하다. 조 전 감독은 우선 거주지인 경기도 이천서 가까운 두산·LG의 2군부터 찾을 생각이다. “가까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좀 보러 다니려고 한다. 2군 선수들 파악도 하고, 두산과 LG의 육성 스케줄 같은 것도 공부할 생각이다.” 조 전 감독은 다시 씨앗을 뿌리고 있다.
*조범현
1960년 10월
1982년 OB 입단. OB(1982~1990), 삼성(1991~1992)
삼성, 쌍방울, KIA 배터리코치
SK(2003~2006), KIA(2008~2011), kt(2013~2016) 감독
2009년 KIA 우승,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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