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생전 퇴위' 언급…역사 속 일왕 위상 변천은?
↑ 일왕/사진=MBN |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생전 퇴위' 의향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역사 속에서 일왕이 차지하는 위상에 새삼 관심이 쏠립니다.
일왕이 '덴노'(天皇·천황)라는 칭호로 정착한 것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덴무(天武) 일왕(673∼686년 재위)때부터 일본은 '덴노'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그때부터 일왕의 지위는 절대화·신격화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별로 일왕의 위상은 변천을 거듭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의하면, 나라(奈良) 시대(710∼794)부터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까지는 일왕은 정치와 제사의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섭정, 상왕 정치, 무가(武家)의 대두 등에 의해 정치적 권능을 서서히 잃어갔습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1336∼1573)에는 일왕이 이전까지 맡아온 다수의 궁중제사가 폐지되면서 더욱 힘이 빠졌습니다.
그러다 에도(江戶) 시대(1603∼1867) 말기에 '존왕론'이 높아지면서 일왕의 권위가 회복됐고 결국에는 메이지(明治) 헌법(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 절대적 권위의 일왕으로 연결됐습니다.
1889년 공포된 메이지헌법이 제1조에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이를 통치한다'고, 제4조에서 '덴노는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각각 규정함으로써 일왕은 절대군주로 '부활'한 것입니다.
총리나 내각 관련 규정조차 두지 않은 메이지 헌법으로 인해 패전 이전의 일본은 엄밀히 말해 '헌법 기구'로서의 내각도, 총리도 없는 나라가 됨으로써 문민 통제가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군부의 폭주를 허용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결국 이 메이지헌법 하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대원수'로서 육·해군을 통수한 쇼와(昭和·히로히토) 일왕(1926∼1989년 재위)은 패전후에도 자리를 유지하긴 했지만 전쟁 책임론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패전후 연합군 통치시기인 1946년에는 현재의 일왕제가 자리잡게 한 두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46년 1월 1일 쇼와 일왕이 '국운진흥조서'를 통해 덴노가 '신'이 아님을 천명한 이른바 '인간선언'을 했고 그해 11월 3일 공포된 현행 헌법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로써 일왕은 헌법이 정한 국사 행위(외국의 대사 접수, 각종 의식 주재 등) 말고는 국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현행 헌법하의 첫 일왕이 현 아키히토 일왕입니다. 그가 '생전 퇴위'를 하고 싶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할 수 없는 것은 생전 퇴위 규정을 두지 않은 왕실 전범의 개정으로 연결되는 일이기에 '국정 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일본 언론은 지적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과거 일왕을 중심으로 국가 총동원 체제가 가동됐던 전쟁 시기를 그리워하는 일본의 일부 강경 우익 세력들은 일왕을 '국가원수'로 헌법에 명기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현 집권 자민당도 2012년 마련한 개헌안 초안에서 일왕을 '일본국의 원수'로 명기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일왕이 왕실 전범에 규정이 없는 '생전 퇴위'를 하려는 것이 일왕에게 권력이 집중됐던 메이지 시대 이후의 왕실 잔재를 청산하고, 현 시대에 어울리는 왕실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생각의 발로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시대에 따라 일왕의 권한과 위상은 달라졌지만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일본 국민들의 정서에 미친 영향과 국민들이 보내는 경외심은 지대하다는 것이 중평입니다.
연합군 점령기 일본은 일왕의 전쟁 책임 추궁을 면제받고 '천황제'를 보존하는 조건으로 전쟁할 권리
지금도 일본 방송사들은 일왕에게 '폐하'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물론 술어도 '했습니다' 대신 '하셨습니다'라는 경어를 씁니다. 또 일왕의 손주들에게까지 '님'이라는 의미의 '사마'(樣)를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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