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거듭난 오승환(31)의 선수생활이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다. 고교시절 부상때문에 타자로 전향해야했고 프로 지명도 받지 못했다. 두 번의 큰 부상이 오승환을 따라붙었다. 바닥에서 정상으로, 정상에서 다시 내려와 밑바닥부터 이를 악물고 다시 빛으로 헤쳐 나온 굴곡이 있었다.
그때마다 오승환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성실’이라는 인고의 재능이었다. 오승환을 아는 이들이 손꼽는 그의 가장 큰 재능은 끝없는 노력이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끝판대장’에서 일본 명문구단 한신의 수호신까지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온 오승환의 길은 야구인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그래서 더욱 값진 면이 있다.
한서고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140km를 뿌렸던 오승환이었지만 이내 시련이 찾아왔다. 오른쪽 팔꿈치 부상이 시작된 것. 결국 경기고로 전학한 이후에는 아예 전업 타자로 전향했다. 투수로서는 공을 던지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오승환은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다. 야구선수로서의 첫 좌절이었다. 하지만 오승환을 눈여겨 본 강문길 전 단국대 감독이 대학무대로 그를 이끌었다. 이후에도 지긋지긋한 팔꿈치 통증은 여전히 오승환을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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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에서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한 오승환의 야구 경력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룩한 길이다. 사진=MK스포츠 DB |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까지 마친 오승환은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쳤고, 강속구 투구로 거듭났다. 이후 2005년 삼성에 입단해 61경기서 10승1패 16세이브 11홀드 평균자책점 1.18의 놀라운 성적을 올리며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이듬해에는 47세이브의 아시아신기록을 달성하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2008년까지 승승장구하면서 마무리의 새 역사를 쓰던 오승환은 2009년 다시 좌절을 맛봤다. 어깨근육 파열로 2009년 35경기서 평균자책점 4.83에 그쳤다. 이어 2010년에는 다시 팔꿈치 통증으로 16경기서 평균자책점 4.50에 그쳤다. 2년간 오승환이 수확한 세이브는 단 23개.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이미 지독한 부상을 경험한 그였기에 조심스레 미래에 대한 비관론도 돌았다. 강력한 구위가 강점이었던 투수가 부상 이후 제 구위를 찾지 못하고 경쟁력을 잃는 것은 야구판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승환은 2011년 극적으로 부활했다. 투구폼까지 다소 수정하는 등 진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더했다. 54경기서 1승 47세이브 평균자책점 0.63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역대 최소경기(333경기) 200세이브의 금자탑을 세웠다. 팀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끈데 이어 한국시리즈서 3세이브를 거두며 시리즈 MVP에도 올랐다.
이후 2012년에도 활약을 이어간 오승환은 시즌 종료 후 조심스레 해외진출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삼성은 우승을 위해 오승환의 잔류를 요청했다. 오승환 역시 푸른피의 사나이답게 흔쾌히 구단의 의사를 수락, 올해도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오승환의 선택은 지극정성을 보인 한신이었다. 일찌감치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한신은 계약기간 2년 계약금 2억엔 연봉 3억엔 인센티브 1억엔 이적료 5000만엔 등 총 9억5000만엔의 조건으로 오승환을 붙잡았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대우다. 일본에 진출한 역대 한국인 선수 중 최고 몸값이기도 하다. 이제 오승환의 도전은 시작이다. 낯선 환경과 문화. 더 수준높은 일본 리그. 집중 견제. 부담감 등은 해결해야할 숙제다. 하지만 그의 역경을 이렇게 한 번 돌이켜보면, 어쩐지 수월하게
“내 꿈과 미래를 위해서는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피나는 노력이 중요하다.”
오승환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래서 더욱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승환은 이미 자신이 걸어온 길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또한 그것이 오승환의 계속된 다음 도전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와 믿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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